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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6.10/토)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우울증_삶에 힘을 빼는 법>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전 목과 어깨가 많이 아픈데요. 이게 다 긴장도가 높아서라네요. 의사 선생님께서 힘을 빼라는데.. 어떻게 해야는지 잘 모르겠어요. 목과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서 생기는 질병이라고 하셨는데 전 힘을 준 기억이 없거든요.


샘은 간단하게 말씀하시지만, 저에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연필을 잡고 있던 걸 놓으라고 하면 놓으면 되겠죠? 그런데 문제는 언제 어디로 연필을 쥐고 있는지 모른다는 게 문제예요.


살면서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죠?


”힘을 좀 빼는 게 좋겠어 “


자본주의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라고요. 경쟁으로 똘똘 뭉친 입시제도와 사회제도가 문제지요. 개인이 똑똑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복지 후진국도 한 몫하고요. 이렇게 길러 놓고서는 성인이 되니 힘을 빼야 한다고 합니다. 참 모순덩어리 사회 아닌가요!


우리가 힘을 빼는 법을 모르는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배운 적이 없으니깐요. 우리는 그저 시대의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찾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됐습니다. 우리는 의식 높은 국민이고 건강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니깐요.


시험을 볼 때도 힘을 빼야 하고, 면접을 볼 때도 힘을 빼야 합니다. 글을 쓸 때도 힘을 빼야 하고, 우울증에도 힘을 빼야 합니다. 대부분의 모든 긴장은 독이 되고 병이 되거든요.


저는 이 의문을 가지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힘을 뺀다는 건 버티지 않는 일이구나 “


저의 정신과 선생님은 증상이 왔을 때 흰 약이 아니라 분홍약을 먹으라고 하셨어요.

흰 약은 우울증 약이지만 이 주 후에 약효가 나타난다고요.


우울증이 심할 땐 우울증 약을 먹는 게 아니고 분홍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분홍 안정제는 깔아지거든요. 깔아지면 몽롱해지거나 잠들게 됩니다.


낮에는 자고 싶지 않잖아요. 할 일도 많고, 자고 일어나면 저녁이 되고요. 또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저를 자책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덜 먹으려고 버텼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몽롱합니다. 그래도 자지 않고 버티려고 노력했습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굳이 한 줄 쓰고 또 졸면서도 굳이 한 줄 읽고요.


이런 낮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이번주에 정신과를 다녀오고 나서 다시 과호흡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얼른 반알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아서 또 반의 반알을 먹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실신했지요. 그냥 그럴 각오였어요. 책을 보다 쓰러지면 쓰러져 버리자.


그렇게 세 시간을 자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기분도 그렇고 컨디션도 그렇고요. 낮에 잤다고 밤에 잠이 안 오는 건 아니에요. 선생님이 주신 강력한 분홍약은 소도 베개만 주면 재울 아이니깐요.


제가 거부하느라 안 먹어서 그렇지 강력한 안정제예요. 잘 먹으면 불면증도 같이 해결될 수 있었던 거였는데 사서 고생을 했습니다. 제 생각이 , 제 의지가 힘을 빼지 못하게 버티고 있었던 거죠. 불면증은 우울증에 최악이거든요.


단 부작용이 있어요. 어떨 때는 약에 취해 며칠을 헤맬지를 모릅니다. 약을 끊고도 정신이 돌아오는데 이삼일은 걸릴 수도 있고요. 환자의 상태마다 그때그때 다른 거 같습니다.


힘을 주는 건요->

지하철이 정차할 때 어떻게 하세요?

다리에 힘을 주고 손잡이를 꼭 잡고 버티시죠. 네 맞습니다. 이게 버티고 힘을 주는 거예요.


힘을 빼는 건요->

정착역에서 다리와 팔에 힘을 빼는 거예요. 넘어지더라더요. 넘어져야 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지하철 브레이크가 고장 났을 때 천장에 손잡이를 잡고 계신 게 안전할까요? 아님 낮은 자세로 엎드리신 게 안전할까요?


때론 힘의 방향을 바꿀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론 기절하시는 게 물리적으로 덜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계속 힘을 주고 있으면 더 다칠 확률이 높거든요. 네 맞습니다. 이게 힘을 빼는 방법입니다.


그럼 계속해서 넘어지라는 거냐고요?

물론 아니죠. 그럴 리가요~


때론 넘어져야 할 때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치과에서도 어떤가요?

턱에 힘을 빼야 충치를 치료할 수 있잖아요.


넘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힘을 뺀다는 건 일련의 습관을 바꾸는 과정 같은 거예요.


맞서지 않아야 할 때도 맞서고, 버티지 않아야 할 때도 버티면 병이 되고 불꽃이 나게 마련입니다.


힘을 빼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새어 나옵니다. 무리하게 힘을 주지 않으니 지치지 않아서도 좋고요. 주변에서도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당신의 내공의 깊이를요.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요?

여유로운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고 가까이하고 싶지요. 그릇이 커 보이고 뭔가 배울 게 있을 거 같은 느낌을 받고요. 그런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은 자연 그대로의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은 곧 삶에 균형을 맞춰 주는 저울입니다.


자~

이제, 아기 때부터 꼭 쥔 주먹을 언제 펴고, 언제 잡아야 하는지 새로 배우실 준비가 되신 거죠?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도 아직 잘 못합니다.


그러면 어때요.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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