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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Jun 05. 2023

오늘이 그 친구 생일이라서

어른이 되지 못한 상태로 만나고 헤어진 그 친구

    저녁에 술약속이 있었다. 한국인보다 외국인에게 더 알려진 곳인 듯 우리 테이블 말고는 다 외국인이었다. 왼쪽에서 들려오는 영어,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중국어, 왼쪽 미국영어 손님이 떠나고 들려오는 호주영어, 오른쪽 중국어 손님이 떠나고 들려오는 태국어 속에서 정신없이 있다가 갑자기 울고 말았다. 그날은 0월 00일. 십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가장 친했던 친구의 생일이었다. 내 앞에 앉아있던 또 다른 친구는 내가 왜 우는 지 알 것 같다며 휴지를 건네주었다. 나 같은 술고래가 겨우 칵테일바에서 술 때문에 울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민망하니까 술기운에 그랬다고 치자. 어쩌면 그날은 생일을 축하하며 둘이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을 텐데 90년대 우리가 함께 상상하던 우리의 미래와 달리 2023년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만났다. 그때부터 모든 기억을 함께 하다가 이제는 혼자 해내려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1학년 때부터 친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요즘 같이 저출생으로 고통받던 때도 아니고, 시골 학교도 아니고, 도심 한복판에서 고등학교 1, 2, 3학년 모두 같은 반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운명적이라고 생각하며 붙어다녔다.


3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이혼가정이었고 나는 사별가정이었다. 그걸 알고도 우리가 왜 내내 같은 반이었는지는 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결손가정의 여린 청소년들이 서로 잘 지내고 전혀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은데 학교 입장에서는 뭐하러 우리 둘을 떼어놓았겠는가.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우리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이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단지 그것 때문에 우리 우정에 금이 간 건 아니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우리 성향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외모에 많은 관심이 없다. 노화를 좀 늦춰보려고 선크림을 바르는 정도이지 예민하게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따라가지 못한다. 예쁘게 생긴 내 친구는 고등학생 때도 최신 유행을 따랐고 나도 그래주길 바랐다. 어릴 때는 그게 그 아이가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되고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함께 다니기 좋은 모습으로 나를 꾸미려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내 친구와 같이 다니지 말라며 걔는 너무 못생겼다는 말도 했었다. 나는 그 못생긴 친구와는 여전히 좋은 친구이지만 이 예쁜 친구와는 함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걔가 예뻐서 헤어졌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예쁘면 좋지. 다만 당시에 내 자아가 거기에 따를 수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해주면 좋겠다. 그런 걸로 친구네 아니네 했던 우리는 참 어렸다.


나는 20대 초반에 동네 대형교회에서 주일마다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교회 측에 돈을 받지 않고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러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게 낫다고 말씀을 하셔서 꽤 오랫동안 그렇게 했었다.


내가 하던 일은 새로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이었는데 거기서 아주 낯익은 집전화번호를 보게 된다. 그 친구의 집 전화번호였다. 요즘과 달리 휴대폰이 없어서 집으로 전화를 해 친구를 불러내던 landline 시절 이야기. 어? 아는 번혼데? 그날 교회에 새로 온 사람 중에 내 친구의 새엄마가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적어서 낸 새신자등록카드를 읽다가 가족관계를 적는 칸에서 내 눈이 멈췄다.


거기에 내 친구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매일 놀러가던 그 주소를 적었고 내가 매일 전화하던 그 번호를 적었고 내가 아는 내 친구의 동생 이름도 가족관계칸에 있었는데 내 친구만 없었다. 그 여자는 내 친구를 자기 가족관계 범주 안에 넣고 있지 않았던 거다. 재혼해서 함께 수 년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남편의 딸은 빼고 자기 남편과 자기가 함께 낳은 딸만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걸 그 종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얘기를 한번도 친구에게 한 적이 없다. 엄마아빠가 이혼한 것도, 아빠랑 살고 있다는 것도, 그 어린 동생과는 엄마가 다르다는 것도 다 알던 사실이었지만 그 여자가 내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제야 알았다. 맞다. 나는 내 친구를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가 나를 예쁘게 바꾸려고 했던 것을 내가 싫어했던 것처럼 아마 내 친구도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걸 싫어할 수도 있었겠다.


어쩌면 이건 우정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 여러 가지가 쌓여서 그렇게 된 거네..


맞은 편에서 칵테일을 마시던 친구가 내 얘기를 듣다가 대꾸했다. 0월 00일. 어떻게 보면 주민등록번호의 반을 알고 있는 친한 사이인데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낸다는 게 슬펐다.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얘만큼 깊게 할 친구가 없다. 내 기억의 조각을 그 친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이 관계는 끝이 난 거였다.


싸이월드 시절, 마이홈피에 일촌공개로 올린 내 청첩장을 보고 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결혼을 하는데 왜 자기한테 연락을 안 하냐며 화를 냈었다. 남자친구를 사귀고 그와 결혼을 이야기하고 청첩장을 찍어서 싸이월드에 올릴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으면 그 결혼식은 안 와야 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나는 당시에 어른들의 극심한 반대로 개인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서 결혼을 한 거였기 때문에 쟤는 내 사람일까 아닐까 고민이 되던 사람들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아마 큰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어른들이 사람을 시켜서 결혼식장에 깡패를 부르면 어떡하지, 라는 상상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ENFP) 관계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까지 초대할 만한 보짱은 없었던 것이다.  *보짱 : 마음속에 품은 꿋꿋한 생각이나 요량 (비슷한 말:배짱)


깡패도 없고 그 친구도 없는 결혼식을 치르고 외국 국적의 남편을 따라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코로나를 계기로 한국에 돌아온 지 오늘로 3년 차이다.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 나는 인스타에 공개계정을 만들었다. 매일 자라는 아이 얼굴 사진을 편하게 올리는 비공개계정은 있었는데 공개계정은 처음이었다. 다시 내 나라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니까 어쩌면 과거의 어떤 사람들은 가끔 나를 찾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인스타에서 이름은 검색해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공개계정으로 처음 연락이 온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DM을 보고 들어간 그녀의 프로필은 화려했다.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고 자기 계발에도 힘쓰는 것 같았다. 여전히 예뻤고 나에게 너무 잘해주시던 친정엄마도 사진 상으로 건강해보이셔서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잘 지내지 못해서 당장 만나지는 못할 것 같다는 답장을 쓸 수밖에 없었다. 3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영국에서 코로나로 인해 너무 많은 일을 막 겪은 상태였고 자살로 친구도 잃었다. 내 손으로 일일이 꾸민 영국 집은 도망치듯 두고 나오느라 내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홀어머니가 사시는 집에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5살 아이만 겨우 데리고 도망친 꼴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건 전쟁이었다. 주변에서 너무 사람이 죽어나가다보니 거기 더 머무르면 내 아이도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던 시기였다. 남편은 Keyworker인 지라 재택근무를 할 수 없었고 살려고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울증이 심해진 남편은 갑자기 나와 아이의 인생에서 사라졌고 서류 상으로 이혼한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싱글맘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세한 설명 없이 뭉뚱그려 잘 지내지 못해 만나지 못하겠다는 나의 말에 그 친구는 우리 엄마 건강 걱정부터 해주었다. 우리 사이에 십여년의 공유하는 인생이 없었더라도 얘가 여전히 내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아이 인스타 사진만으로도 아주머니가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이 행여 우리 엄마가 아프시기라도 한 것일까봐 걔가 걱정하는 것처럼.


친구는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본인도 연락을 하기까지 생각이 많았다며 자기 전화번호를 남겨주었다. 때가 되면 언제든지 연락을 하라고.


나는 코로나 역이민 후 여전히 남편과 한 집에 살지는 않지만 내년쯤에 다시 한 집에 살 생각으로 대충 지내고 있다. 약 1년 동안 물리적으로 사라졌던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고 미안하다고 앞으로 잘 살아보자는 뻔한 화해 카드를 남발하며 그는 하루에 문자를 수백개씩 보낸다. 내 단말기는 그 카드를 아직 인식하지 못하지만 나도 오류를 수정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 노력 중에 이 친구의 생일을 맞이하여 어쩌면 이 친구에게 내년쯤엔 전화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고 찔찔 울면서 너가 겪은 나쁜 일은 하나도 나한테 말하지 말고 너는 좋은 것만 나한테 얘기하라고, 너네 남편이 엄청 잘해준다고, 아이가 너무 건강하다고, 너가 하는 일이 너무 잘되어서 해외로 확장할 거라고 뭐 그런 얘기만 하라고 윽박지르고 싶다.


어쩌면 그 친구가 내 공개계정을 찾아준 것처럼 브런치도 찾아서 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3년 전 그 번호가 여전하냐고 여기서 묻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커버 사진을 무엇으로 할까 찾아봤는데 아이랑 mbc에 갔던 사진으로 골랐다. 만나면 좋은 친구이니까. 만나면 좋을 친구이기를 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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