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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Sep 18. 2023

네가 의무감이 뭐냐고 물었어

- 엄마! 의무감이 뭐야?


책을 읽던 아이가 갑자기 물어서 당황했고 대답하지 못할 뻔했다. 과연 의무감이 뭘까?어린이에겐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속마음) 의무감이란 너와 끝말잇기를 하는데 네가 캐릭터 '무지'를 이야기했고, 내 차례이니까 '지랄'을 하고 싶지만 '지우개'를 하는 거, 뭐 이런 게 엄마의 의무감이랄까..? 내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우개 보다는 지랄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 같은데 말이야. '지랄'하지 않고 '지우개'를 하는 마음?  


의무감(義務感) : 의무를 느끼는 마음

의무 :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


(출력되는 말) 의무감은 Duty와 같은 건데 네가 밥을 먹고 나면 이를 닦는 거. 학생이니까 학교에 가야 하는 거. 뭐 그런 걸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게 의무감이야.




나는 요즘 sns에서 감동짤이라면서 보여주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 상식에서 저런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 같은 건데 감동이라느니 대단하다느니 배워야 한다느니, 얼마나 세상에서 상식이 사라졌으면 이런 걸로 감동을 받아야 하는지 씁쓸하다. 누가 넘어졌는데 일어나도록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한 일을 해야 했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선행자들의 답변이 이해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그런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학생 20여명이 있는 곳에서 어떤 봉사를 했는데 고맙습니다, 라고 말한 학생은 한 명 뿐이었다. 그날 저녁, 내 아이를 붙들고 말했다. 너는 그러면 안 된다고. 어떤 분이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아도 해주셨을 때는 반드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내가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받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맙다고 말하는 아이가 예뻐보여서, 그게 더 고마워서 내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어서.


9월 초, 아이와 오사카 여행을 했다. 복잡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아이와 앞뒤로 서 있었다. 거기도 한줄서기를 하는지 한쪽은 비워있었는데 갑자기 비닐봉지 하나가 위에서 날아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교복을 입은 내 아이 또래 여자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내 보기엔 그냥 비닐봉지인데, 그 아이에겐 중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쓰레기가 바람에 날아간 것을 끝까지 처리하고 싶었던 것인지,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 어떤 어른도 밑으로 살랑살랑 내려가고 있는 비닐봉지를 주우려 하지 않았다. 뭐, 그것도 괜찮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함부로 손을 대면 손가락이라도 잘릴까봐 무서운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데 그때 내 아이가... 저벅저벅 내려가더니 (우린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비닐봉지를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맨 위 끝에서 만난 교복을 입은 또래 일본 여자아이에게 그걸 건네주었다. 일본 아이가 말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때 내 아이의 뺨이 잠깐 발그레 해졌던 것도 같다. 당연한 일을 해야 했을 뿐이지만 나는 손가락이 잘릴까봐 무서워서 못했고 아이도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일어난 일 덕분에 아이는 티비 드라마가 아닌, 무엇을 계산했을 때 듣는 소리가 아닌 찐 아리가또를 그것도 또래 아이에게 들을 수 있었다.




몇 달 전에 한국 지하철에서 똑같은 상황이 있었다. 아이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밑에서 위로 막 올라가려고 하는 상황이었는데 다른 곳보다 깊이가 있어서 굉장히 오랫동안 올라가는 곳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오랫동안 내려와야 할 만큼 긴 곳이라는 얘긴데 저기 맨 위에서 어떤 플라스틱 케이스를 떨어뜨린 중학생이 '아악 안돼!!' 소리를 지르며 혼자 탁탁탁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머 학생!! 손가락 다쳐요! 주우면서 내려오지 말아요!'


급하게 반대쪽으로 몸을 옮긴 나는 각종 미술도구들이 우당탕탕 내려오고 있는 걸 보았다. 연필 지우개 칼 자 등등등 미술을 하는 학생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학생 혼자 부끄럽게(?) 이런 것들을 줍게 놔둘 순 없다는 생각에 도와달라고도 안했는데 지우개와 각종 조각조각들을 주워서 한쪽에 모아두었다.


'미술하는 학생인가봐요'


학생은 대답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도구들을 같이 정리하고 치웠는데도 끝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이 도와달라고도 안했으니까 고마울 필요도 없던 걸까. 정리가 다 끝나고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나는 내 아이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 학생은 지하철을 타러 걸어갔다.




의무감이란 무엇일까.

그냥 자동반사 같은 거 아닐까.

갑자기 비닐봉지가 내려오면 줍고 싶은 거.

갑자기 미술도구들이 흩어지면 도와주고 싶은 거.

누가 나를 도와주면 고맙다는 말이 자꾸만 나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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