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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Aug 21. 2023

네가 몽당연필을 모았어

많이 깎아 써서 길이가 아주 짧아진 연필을 몽당연필이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몽당'이 붙은 말 중에는 몽당바지, 몽당붓, 몽당비(몽당빗자루), 몽당소나무, 몽당솔, 몽당수염, 몽당숟가락, 몽당치마 등이 있었다. 여기서 소개하지 않은 말들은 모두 사고나 병으로 없어진 신체와 관련된 말이라 일부러 뺐다. '몽당'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연필을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더 많이 쥐었다. 연필과 함께 한 지난 2년 6개월. 아이 필통에는 몽당연필이 제법 쌓였다. 입학한다고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다양한 필통들을 스스로 관리하면 참 좋겠지만 너무 지저분해보일 땐 내가 열어보고 정리하기도 한다. 어릴 땐 친정엄마가 물어보지도 않고 내 물건을 손대면 참 싫더니만 결국 나도 그러고 있다. 다행히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우리 엄마는 내 물건들을 물어보지도 않고 버려서 문제가 된 것이었고 나는 아이의 필통 속을 그냥 정리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달리 나는 아이 필통 속 꼬깃꼬깃 작은 쪽지 하나도 (몰래 읽어보기는 하지만) 버리지는 못하겠다. 아이가 그 쪽지에 무슨 사연이 있을 줄 알고 함부로 버리겠는가.


어느 날은 아이 필통에서 몽당연필들을 한 줌 꺼내게 되었다. 아이에게 여덟 자루의 몽당연필이 있다면 내게는 네 자루의 연필이 생기는 셈이다. 게다가 이 연필들은 보통 연필 사이즈보다 조금 더 기다랗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사진을 보여드리겠다.


막 깎아서 나무 냄새가 나는 내 사랑스러운 연필들. 내 아이가 손때를 묻히고, 자기 이빨로 잘근잘근 물어놓고, 자기 이름 스티커를 붙여놓고, 끝에 조금 붙어 있는 지우개를 다 써버린 연필들은 끄트머리를 서로 투명테이프로 붙여서 기다란 연필로 다시 만들어 내 책상 위에 두고 쓴다.


초등학교에서 띄어쓰기를 배우고, 더하기와 분수를 배우던 이 연필들은 이제 어른의 스케줄을 적고 시장에서 사야 할 것들을 적는다. 가끔은 각종 전화번호를 적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통화를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번호를 저장하는 초능력이 있나본데 나는 여전히 잠깐만요 잠깐만요 적을 것 좀 찾고요, 네, 준비됐어요! 하면서 연필을 들고 상대방이 불러주는 번호를 적는다.  


또 이 연필들은 샤파에 넣기도 수월하다. 내 주먹보다 작아진 몽당연필들을 샤파에 함부로 넣었다가는 꺼내기 힘들어지는 수가 있다. 샤파 이야기는 조금 더 해야겠다. 나는 8-9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닐 때 노란색 샤파 연필깎기를 썼는데 거기엔 88 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20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잘 깎이는 기가 막힌 제품이었는데 해외생활을 오래 하다가 40대에 다시 한국에 와 친정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내가 아이와 다시 한국에 오기 바로 며칠 전에 그 샤파를 버리셨다는 거다.


- 아니, 너 가고 나서 내가 연필 쓸 일이 뭐가 있어. 하필이면 얼마 전에 대청소하다가 버렸지?  


70이 가까워져도 변치 않는 엄마의 버리는 손. 그 손에 키워지고 그 버리는 손 때문에 상처받는 나까지 여전하다. 결국 아이 입학을 앞두고 문구점에 가서 연필깎이를 사주려는데 어머나 세상에 네상에 다섯상에. 그 샤파가 똑같은 크기, 똑같은 디자인, 하지만 호돌이는 없고 다른 그림딱지를 붙이고 팔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신기한 마음으로, 하지만 노란색 내 샤파를 약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분홍색 샤파를 아이에게 사주었다. 엄마도 똑같은 것을 썼다는 이야기에 아이는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고르지 않고 분홍색 샤파를 골랐다.


학원에 다녀온 아이가 새로 생긴 엄마의 연필을 보더니 소리친다.


- 엄마! 이건 아직 살아있었는데 왜 이렇게 만들었어!


아이는 몽당연필 한 자루가 자기가 쓸만하게 길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한다.


우리말로는 연필깍지라고 하는, 몽당연필 홀더 같은 제품들도 독일산, 일본산, 한정판, 고급판, 익스텐더 하면서 시중에 나와있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선물을 받으면 몰라, 일부러 사서 쓸 것 같지는 않다. 셀로판테이프 몇 센티미터면 두 몽당연필을 붙여서 쓰기에 그저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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