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양쪽 얘기 다 들어봐야겠지만 일단 내 얘기부터 해보자.
나는 십여년을 층간소음이 없는
아니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층간소음 스트레스가 적은 영국의 플랏(한국의 아파트 개념)에서 살다가 2020년에 한국에 돌아왔다. 영국에서는 세 가지 다른 플랏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아봤는데(Kingston, Esher, Rochester 지역) 단 한번도 층간소음 때문에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 오해 말자, 소음에 대한 문제는 물론 있었다. Kingston에서는 건너편 플랏이 신축공사를 하는 바람에 매일 시끄러웠고 Esher에서는 대각선 아랫집이 한때 그릇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고 싸워서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고 Rochester에 살 때는 윗집 할머니가 폐가 안 좋으셨는지 (코로나 이전 이야기) 매일 기침을 심하게 하셔서 그분이 외출 중이거나 휴가 중임에도 괜히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을 겪기도 했다.
십여년간 그 세 가지 일 말고는 기억에 남는 '층간'소음은 없었다. 아이를 낳고는 바로 아래층이 주차장인 플랏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아래층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또 아이가 걸음마가 매우 느렸던 터라 뛰는 걸 저지해야 할 때는 이미 말귀를 잘 알아듣는 어린이가 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이런저런 일들이 가정에 생겼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020년 당시에는 입국자는 2주 자가격리를 해야했기 때문에 친정엄마가 집을 비워주고 다른 곳에서 지내셨다. 그때 엄마는 아래에 아무도 안 사는 것 같으니 아이와 편하게 지내라고 했지만 딱히 아이가 뛰거나 신체적으로 활발한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자가격리를 끝내고 미리 알아본 유치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주말. 아이가 자기만 줄넘기를 잘 못 뛴다고 다른 아이들은 다 잘 한다고, 연습을 해야겠다고 했다. 그래, 한번 연습해보자. 쿵. 쿵. 쿵. 한 다섯 번 뛰었나. 그러더니 아이가 힘들다고 하기 싫다고 했다. 원래 좀 그렇다. 신체적인 운동을 오래 하지 못한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쾅쾅쾅쾅. 뭐지. 나가보니 아랫집 남자였다. 나는 정말 너무너무 깜짝 놀랐다. 친정엄마가 분명 아래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잘못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그저 아래에 all along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 집은 언제나 불이 꺼져있었다. 조금 무서웠다. 게다가 4,5분도 아니고 네댓번 뛴 걸로 밤도 아니고 오후 2시에 이렇게 쏜살같이 올라온다고? 오케이 어떤 사람이 사는 지 이제 알겠음. 뛰어서 너무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우리가 더 놀랐던 이유는 아래집은 전혀 알 수가 없었겠지만 혼자 된 지 오래인 친정엄마와 어쩌다보니 남편과 떨어져지내게 된 나와 딸아이가 모두 여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자 셋이 사는 집이라 웬 성인 남자가 갑자기 현관을 두드리며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무리 우리가 성정머리가 온순하지 않은 여자들이라고 해도 좀 놀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된 것 같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윗집에 마구 뛰는 유치원생이 살고 있다고 입력이 된 거였다.
그때 첫대면을 했을 때 나는 우리가 그동안 아래에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고 믿고 살았기 때문에 그동안 혹시 엄청난 고통을 받고 계셨던 건 아닐까 걱정을 했다. 또 한국식 아파트에 오랜만에 살아봐서 어떤 느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그 남자에게 평소에도 소리가 심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렇다고, 주중 낮에도 소리가 심하다는 대답을 했다.
주중 낮에도 집에 계시는 분인가보군. 거기서 또 쎄함을 느꼈다. 평소 낮에는 우리집이 빈다. 친정엄마도 나도 일을 하고 아이는 오후 5시까지 유치원에 있다. 소리가 날 수가 없다. 뭐 이 사람도 내 질문에 갑자기 <평소에는 아주 고요하지만 오늘은 아이가 줄넘기 연습을 콩콩콩콩 네댓번 하는 바람에 소리가 매우 컸네요>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터. 대충 그렇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남자는 20층짜리 아파트에서 나는 온갖 모든 소리를 우리집 탓으로 돌렸다. 그동안 어떻게 아랫집에 아무도 없었다고 알고 있었는지 우리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집에 아무도 없어서 소리가 우리집 출처가 아니라고 해도 현관문 안 열어주고 가만히 있는 거일 수도 있지 않느냐며 따졌고 경비실에서 지금 20층에서 공사중이라 소리가 나는 거라고 정확한 clue를 줬는데도 아니라고, 바로 윗집에서 나는 소리라고, 윗집에서 공사를 하는 거라고 우겼다. 자기가 계단으로 우리 층에 올라와봤는데(소름) 그 소리가 났다고 했다. 인생에 과학이 없는 사람 같았다. 차라리 할아버지라면 이해를 했을 텐데 MZ세대임이 틀림었는데도 그렇게 우겼다. 조립식 아파트라 20층 공사소리는 1층부터 20층까지 어차피 어느 층에 있든 다 들리는 거라고 설명을 해도 듣지를 않았다. 경비실에서는 결국 그 남자에게 지쳐 이제 민원이 들어와도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겠다는 소리까지 한 터였다.
그의 증세는 갈수록 심해져 새벽 4시에 인터폰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 혹시 공사 중이냐며 조용히 하라고 그랬다. 잠을 자다가 인터폰 소리에 놀라 깬 우리는 그날 결국 폭발했다. 자다 봉창 두드리는 게 이런 거구나, 나는 결국 헛소리까지 지껄이고 말았다
- 혹시 나 좋아하냐 왜 이렇게 연락을 하냐
물론 그가 한참 어렸기 때문에 친 드립이었다. 오해 말자. 그는 어이없어하면서 자기는 결혼을 했다고 그랬다. 그러면 사모님이 계시는데 왜 여자들 사는 집에 굳이 성인 남성이 새벽이고 낮이고 밤이고 올라와서 얼굴 못 봐서 난리냐. 앞으로 사모님 보내라, 너 되게 이상해보인다. (아마도 경비실이 말을 안 들어주니까 그랬겠지만서도) 지금 누가 더 vulnerable인지 잘 생각해봐라. 5살 어린이랑 조용히 자는 집에다가 뭐하는 짓이냐.
멀리 사는 남편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날 우리가 사는 동네로 와서 아랫집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벽간소리, 층간소리, 조립식 아파트에 대한 연설을 한창 하고 나서 모든 소리를 윗집 탓을 하는 건 바르지 않으니 자제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때 경찰이자 그 남자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남편이 그 남자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봐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아무 일도 없어서 너무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국 초등학교에서는 리코더도 필수였지만 칼림바도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 숙제 중에 칼림바 연습이 있어서 역시나 오후 4시에 거실에서 칼림바를 딩, 동, 연주하는데 of course, 그 남자가 또 올라왔다. 나는 그 남자에게 물었다.
- 지금 몇 시예요?
그 남자가 대답했다.
- 오후 4시요.
그러니까요. 아이가 무슨 새벽 4시에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인 악기인 칼림바를 딩, 동, 뭐 30초 했습니까? 한 30분 연주했는데 올라오시면 제가 이러지도 않습니다. 우리 애는 그렇게 집중력이 좋지 않아요. (미안) 이건 뭐 마치 우리집에서 소리 들리기만을 기다렸다가 얼굴 보고 싶어서 올라오는 사람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 남자는 평소에도 피아노 소리가 심해서 지금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올라왔다고 주절댔지만 우리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다만 우리집과 벽을 붙이고 있는 같은 층 다른 라인의 집이 가정피아노학원인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집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이 남자에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속 그렇게 살아온 것을. 마구 뛰노는 게 디폴트인 어린 남자형제를 둔 엄마들은 어떻게 살지? 우리 애는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지금 몇 년동안 저 남자를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그런 집들은 어떻게 살지? 쟤는 왜 모든 소리를 우리집 탓을 하지?
- 원래 소리는 다 윗집에서 나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 남자의 말이었다. 너 MZ아니지....
난 부동산이나 임장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아이 없는 그 부부가 집 선택을 잘못한 것이라고 감히 말해주고 싶다. 그 집 아래에는 가정어린이집이 있고 그 집 앞집은 쌍둥이 영유아를 키우고 있었다. 학군이 좋은 동네라 신혼부부들은 잘 살지 않는 동네이기도 하다. 항상 어린이들이 놀이터에서 시끄럽게 뛰어놀고 학원가가 많아서 담배피우는 청소년들도 많이 보이는 그런 동네에서 고요함을 바라다니.. 아이고두야 아이고심이야
얼마 전, 이삿짐 차가 그 집 짐을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아랫집 무서운 아저씨가 이사를 갔다고 말하자 아이가 너무 기쁘다고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우리도 곧 주택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뭐 조금 더 버텨보시지 그랬냐고 허공에 대고 말하긴 했다.
다음에 에피소드가 좀 더 쌓이면 그 주택가에서 일어난 소음민원처리 이야기를 해볼까 하니 기대하시라. 이 소리는 주택이니까 층간소음은 당연히 아니고 소리로 뱀을 쫓으려고 했던 옆 주택 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이다. 참고로 뱀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 할아버지는 뱀이 아니라 우리 귀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