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대만 여자와 데이팅앱에서 만나 올해 재혼을 할 예정인 영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 왔다. 예비 사모님과 사모님의 십대 딸, 그리고 그 딸의 친구들을 데리고. 보통의 맘카페를 보면 '해외에서 십대 손님이 와요.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추천해주세요.' 따위의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런 걸 검색해볼 재미도 없이 그들의 딸은 친구들과 다니고 우리는 우리끼리 만나기로 했다.
많고 많은 쇼핑 천국 중에 하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동대문을 고른 그들과 DDP 앞에서 만났다. 이게 몇 년 만이야! 4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네! 너무 보고 싶었어!
내 기억 속 동대문은 혈기 왕성한 20대 시절, 자정이 넘어도 잠이 오지 않을 때 동네 친구와 함께 운전 연수 겸 슬슬 차를 몰고 나가서 두타 밀리오레 등을 돌고 옷을 살 때마다 매장에서 '주차권 꼭 주세요!'를 외치던 곳인데 지금은 차를 가지고 오면 안 될 것 같은 복잡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DDP에 주차를 했다) 만난 시간이 오후 4시였는데 일부 매장의 오픈 시간이 오후 8시인 것도 이번에 알았다. 그 때도 그랬었나..? 당시엔 밤에만 다녀서 모르겠다.
대만인 예비 부인이 가보고 싶다고 했던 APM LUXE는 아직 영업 전이었고 고맙게도 두타는 영업을 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가보았다. 라떼는 APM LUXE라는 게 없었던 것 같은데 LUXE니까 뭔가 더 럭셔리한 곳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검색해보니 APM은 주로 남성의류, APM LUXE는 주로 여성의류를 취급하는 모양이다. 아이고 복잡해라. 두타에는 24년 전(나이 계산하지 말아주세요)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류와 액세서리 등을 팔고 있어서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하에는 올리브영이 있었는데 친구의 부인이 참 좋아했다. 친구의 귀띔으로는 어젯밤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지금 여기가 세 번째 올리브영 쇼핑이라고 했다. 사야 할 목록을 휴대폰으로 보면서 쇼핑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작년 가을에 오사카에서 '여기선 동전파스를 사야 된대!', '오, 이 라면이 맛있대!'하던 내 모습이 생각나 살짝 웃었다.
함께 간 9살 아이는 속옷 매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 엄마, 마네킹은 항문이 없는데 왜 팬티를 입혀 놓았어?
응? 팬티를 홍보하려고 입혀놨을 거라는 설명을 하는데 아이의 반응이 이상하다. 내 대답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고보니 아이가 '항문'이라는 낱말을 생식기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에? 항문이 똥꼬라고? 아하하 지금 알았네. 왜 똥꼬를 항문이라고 해?
뭐 이런 거지. 맘마를 식사라고 하고 쉬야를 소변이라고 하는 거 같은? 물론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외국인 부부에게 굳이 통역하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저녁 10시쯤이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밤시장을 보기 위해 여전히 동대문에 있었고 우리는 졸린 아이가 있어서 재워야 하니까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씻고 하루를 정리하면서 뉴스를 틀어놨는데 푸틴이 김정은에게 아우루스를 선물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아우루스가 뭐지? 푸바오 같은 동물인가? 근데 공룡 같은 건가?
- 미사일인가보지.
아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 것도 알고 러시아와 북한이 사이가 좋다는 것도 알고 그 둘이 특히 미사일을 즐겨 갖고 논다는 것도 알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렇네. 아우루스는 분명 미사일일 거야. 흐흐 (알고 보니 수억원대 최고급 세단이었지만)
이제 불도 다 껐고 잠만 자면 되는 순간이 왔다. 그런데 평소엔 엄마보다 아빠랑 자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가 오늘따라 울면서 꼭 엄마랑 자야 한다고 말했다. 아.. 혼자 편히 자고 싶은데 왜 그러지?
- 엄마, 아빠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나 아빠가 무서워.
알고보니 최근에 아빠가 어느 재판의 증인으로 나선 일이 있었는데 그 재판과 관련된 종이를 자기 전에 몰래 읽은 것이었다. 재판의 내용은 이렇다. 가해자 A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 여럿이 출동을 했고 그 중에 한 명이 아이아빠였다. 가해자A는 체포 과정에서 심하게 저항해서 결국 많이 다쳤고 얼마 뒤 그녀는 B경찰서를 고소한다. B경찰서에서는 당시 현장에 있던 아이아빠에게 증인을 서줄 것을 부탁했고 재판부는 아이아빠의 보디캠에 찍힌 것들을 보고 들으며 B경찰서는 잘못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 아이가 몰래 읽은 부분이 가해자가 어떻게 하다가 다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경찰이 문을 발로 찼고 가해자가 문 뒤에 서 있었고 심한 출혈이 있었고 많은 피가 어디에 어떻게 묻어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들. 심지어 영어였다! 그럴 땐 갑자기 왜 영어 파워가 샘솟는 것이냐!
나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네가 그 부분만 읽어서 그런데 사실 그 가해자는 이러저러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날 반드시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날 아빠와 동료들이 그녀를 잡지 못했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겼을 거라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판사님도 그걸 알고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고 사실은 이게 아빠에게는 좋은 결과였는데 네가 하필이면 그 피 나오는 부분을 읽어서 아빠가 나쁜 사람처럼 비춰질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고....(후략)
이 와중에도 나는 솔직히 아이가 그 긴 재판 결과지를, 그것도 영어로 된 것을, 읽었다는 것에 안심을 했다. 방학 동안에 책을 너무 안 읽어서 큰일이다 싶었는데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은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구나 싶어서. :p
이 멋진 날, 아이는 종일 낱말을 오해했고 그때마다 옆에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문은 사실 똥꼬였고, 아우루스는 미사일이 아니었으며 아빠가 누굴 다치게 한 건 맞지만 그것은 피의자 신분이 아니라 증인 신분으로 승소한 재판의 일부였다.
아이는 가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를 향해 I HATE YOU!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BUT I LOVE YOU.
이렇게 말하면 더 대들면서 더 큰 목소리로 BUT I HATE YOU!!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나는
I ALWAYS LOVE YOU.
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의 I hate you를 오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으면 오해할 말과 오해하지 않을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더는 어린이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