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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Oct 22. 2024

그녀의 날

10월의 시작은 국군의 날, 노인의 날, 개천절로 시끄러웠다. 학부모들은 갑자기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국군의날 임시공휴일에 대해 불평을 했고 나는 수능을 앞둔 학생의 학부모는 아니었지만 개천절을 시작으로 며칠동안 예정되어있었던 시골 초등학교의 가을방학이 취소되는 걸 지켜봐야했다. 


집에 한인이 있는 관계로 세계 한인의 날도 관심있게 지켜봤고, 2002년까지는 5월 8일이었으나 어버이날과 겹친다는 문제로 10월 8일로 바뀐 재향 군인의 날도 군부대가 많은 동네에 살다보니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 다음 날인 한글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MBC 우리말 나들이를 스무남은 해 동안 맡고 있다보니 제2의 생일인 기분이 들 지경이다. 그런데 한글날 다음 날엔 더 대단한 일이 발생하였다. 한강 작가가 무려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한글로 글을 쓰는 한국인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는 이제 외국에 나가서 한국에서 온 작가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내 글을 너무 기대할까봐서. 다른 작가들에게 누를 끼칠까봐서. 한국인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날은 사실 임산부의 날과 정신건강의 날이었지만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호스피스의 날을 맞이하였다. 사실 우리는 항암 치료 중인 남편의 어머니를 호스피스에 모시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요양 병원은 절대 안 가실 거라고 화를 내셨던 어머님이었다. 암 환자만 갈 수 있다는 호스피스를 어떤지 알아보는 와중에 호스피스의 날이라니. 이 날은 남편의 생일이기도 했다. 케이크를 사오긴 했지만 웃음기 없는, 사진도 영상도 찍기가 민망한 우울한 생일 시간을 짧게 보내고 남편은 다시 어머님을 돌보러 집을 나섰다. 


체육의 날엔 친정 엄마가 이사를 하신다 했다. 엄마는 홀로 사시는 노인이지만 내가 가보질 못했다. 시어머니 일로 정신없이 혼자 시골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을 텐데 뭘 와보냐며 괜찮다고, 요새는 이삿짐센터에서 다 해준다며 걱정말라 하셨다. 그리고 같은 날, 시어머니가 결국 호스피스에 입원하셨다. 


달력을 보니 다음 날은 부마민주항쟁이었다. 부산, 마산의 부마였다. 부끄럽지만 5.18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건가 전혀 알지 못해 한참을 검색해보았다. 이제는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정보가 머릿속에 있다. 부마민주항쟁 다음 날 아침, 호스피스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실 것 같다고. 부랴부랴 대강의 짐을 싸서 아이를 학교에서 싣고 서울로 향했다. 나는 시골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산넘고 강넘고 최선을 다해 운전을 했다. 그러나 결국 도착 전에 병원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어머님은 저녁까지 버티지 못하셨다. 장례를 위한 짐을 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를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지만 상조회사 도움으로 이리저리 여차저차 상을 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찰의 날이었다. 경찰인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당신의 날이네. 남편은 사망신고와 은행일 등등을 처리하느라 나와 함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행안부 경찰 국장님이 화환을 보낸 게 생각나 그럼 우리도 뭘 보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보낸 것은 없다. 


나는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도 연락하지 못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날이 그 동료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결혼하고 첫 생일을 맞은 건데 괜한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연락을 하며 그동안 아프셨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미리 말하지 못해 죄송하고 양해를 바란다고 하였다. 


너덜너덜해진 10월 달력을 가만히 바라본다. 국제연합일과 독도의 날, 교정의 날, 지방자치의 날, 회계의 날이 남아있다. 핼러윈이 있어서 이태원 압사 사고 뉴스가 나올 테지. 사실 그 전날이 아빠의 기일이라서 매년 핼러윈은 어차피 무섭고 두려운, 이미 내게는 그런 날이었다. 부모가 없다는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 남편이 이걸 혼자 짊어지지 않도록 아이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년 달력의 10월엔 빨간 날과 남편의 생일, 그리고 그녀의 날만 신경 쓰기를 바라본다. 나는 평소에는 두통이 없는 사람인데 힘든 한 달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이 그냥 힘들다고만 표현하는 것이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항상 찡그리며 머리 아프다고 하셨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랬던 그녀가 그 모든 아픔이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던 모습도 떠오른다. 95년에 아빠가 하얀 천을 얼굴 끝까지 덮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도 갈마보인다. 그 모습을 울면서 보고 있는 14살의 나와 45세의 나도 갈마보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빕니다. 



*갈마보다 : 양쪽을 번갈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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