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의 눈물
나에게 계속 글을 쓰라고 말했던 여러 사람 중에 어쩌면 가장 첫 번째 사람이랄까. 그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문예창작학과 교수였다. 나는 당시에 영어영문학과를 전공하며 문예창작학과를 복수전공 중이었는데 사실 영문과에 더 치중하는 학창 생활이었다. 왜냐하면 문창과는 나중 선택이었고 일단 시작은 영문과로 입학을 한 거니까. 4학년 때 방송사에 방송작가로 취직을 하게 되어 학교 생활을 띄엄띄엄했는데 졸업에 필요한 대강의 점수를 미리 채워넣은 탓에 그래도 되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영문과 교수님들의 말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문창과 교수님 중 한분이 아쉬운 얼굴로 나에게 하셨던 말씀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 기억이 날 때마다 이렇게 적곤 한다. 그는 교수동 건물 밖까지 나를 따라나오며 '너 계속 써라.'라고 말했다. 이미 인사를 드리고 몇 걸음 멀리 떨어진 상태였는데 그때가 졸업 전 마지막 인사였어서 그런가 그분 딴에 어떤 마음이 생겼는가 나를 다시 불러 이 말을 전했던 거였다. 그분은 지금도 활발하게 집필을 하시고 책을 내는 저명한 소설가인데 아마 소설 수업을 들었던 거니까 소설을 쓰라는 얘기였을 거다. 나는 20년째 방송글을 쓰고 있어서 교수님의 쓰라는 말씀은 결과적으로 찰떡같이 들은 거지만 그분이 뜻했던 그 말이 아니었던 것쯤은 안다.
그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수업시간에 종종 눈물을 보였다. 광주 출신이고, 작품을 통해서 광주 이야기를 하셨던 분인데 그 얘길 할 때면 눈물을 보였다. 어린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 저 분이 직접적인 피해자이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의 가족이거나 친구가 죽었거나 뭐 그런 건가보다. 안타깝다.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풋풋한 나이에 졸업을 하고 누구나처럼 여러 풍파를 맞으며 가족도 이루고 이민도 해보고 역이민도 해보고 친구를 자살로 잃기도 하고 그 일로 남편하고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지기도 해보고 다시 회복도 해보고 이래저래 사연 많은 40대 K장녀가 되어 있는 나는 며칠 전에는 '계엄령'이라는 낱말까지 인생 궤적에서 보게 된 것이다. 너무하잖아, 싶을 때 그 교수님이 생각이 났다. 강의실에서 흘리던 그 사람의 눈물을 기억하는데 2024년에 이런 일을 또 겪게 만들다니, 대한민국의 성장 타임라인이 참 가혹하구나.
나는 정치도 모르고 눈치도 없고 뭐 대단한 사회적 장치를 알아서 현 상황에 대한 골치 아픔을 처리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뭘 제안할 수도 분노할 수도 공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데 12월 3일 이후 그분의 눈물이 계속 생각이 나는 거다. 하릴없이 검색창에 교수님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당시에 강의실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분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세 살 정도 많을 뿐이었던 것이다. 십수년 뒤에 비슷한 일로 내가 똑같은 눈물을 흘리게 될 줄 몰랐다.
현 시대에 대한 사설이나 논평 따위의 글은 감히 쓰지도 못한다. 그냥 여러 가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고 싶은 사람으로서, 투표권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 정도는 소극적으로 적어놔야 하지 않겠는가.
* 한강 작가는 14세에 이 분의 소설을 읽고 감명 받아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젊은 경찰분들, 군인 분들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중략) 명령을 내린 사람들의 입장에선 소극적인 것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 스톡홀름 노벨상 수상 기념 회견에서 소설가 한강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