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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Dec 11. 2020

아침 9시, 엄마에서 내가 되는 순간

오후 4시, '나'에서 '엄마'가 되는 순간

아이의 유치원 등원 시간은 아침 8시 40분이다. 

집 앞까지 유치원 버스가 오니까(한달에 2만원을 내고 얻은 시간-안 그러면 유치원까지 20분을(왕복 40분) 찬 바람 맞으며 걸어가야 한다) 간단하게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와서 대충 치우고 앉으면 9시가 된다. 


이때부터는 아이에게 간식을 주지 않아도 되고 

책 읽으라고 잔소리하지 않아도 되고 

종이접기를 함께 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부터 뭐 아침에 가장 머리가 맑으니까 이거를 해라, 저거를 해라, 라는 글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사실 엄마가 되고 나서는 아침에 혼자 있게 되더라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자는 게 신체활동에 더 득이 되는 것 같아 점심 시간을 넘길 때까지 더잘 때도 있고, 머리가 산란하여 책을 읽어도 들어오지가 않으니 차라리 넷플릭스를 켜는 때도 많다. 넷플릭스를 무심코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 보고 멍 때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은 마음으로. 


화면 넘김이 어지러워 티비는 안되겠다 싶을 땐 라디오를 켠다. 그런데 오디오에만 오롯이 집중하여 호스트의 목소리나 음악, 뉴스 등을 듣고 있으면 뭔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눈이 자유고, 손과 발이 자유로운데. 라디오를 들을 땐 청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책이라도 읽으면서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설거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나는 식기세척기가 없다)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왜 꼭 뭘 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꼭 뭘 해야한다고 세팅이 되어 있는 걸까? 

아니라고, 꼭 뭘 격렬하게 안 해도 된다는 투의 수필을 기대한다면 지금 뒤로가기를 누르셔도 좋다. 

   

뭘 안 할거면 나중을 위해 잠이라도 자두자, 라고 생각하는 나는 

차라리 뭘 하면 좋을 지 공유하기로 한다. 


1. 집을 정리하자. 

난 곤도 마리에는 아니지만 미니멀리스트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치울 것은 늘 있다. 내 시간에는 내 것과 관련된 것을 치우는 것이 좋겠다. 예를 들면 책장에 쌓아둔 책을 읽어서 머리에 넣고, sns에 찌끄리고 책을 버리거나 나눈다. 

화장품도 정리한다. 나중에 여행갈 때 써야지, 하며 모아두었던 샘플이 있다면 그냥 지금 쓴다. 여행 당분간 못 간다. 샘플도 유통기한이 있는데 계속 다음을 기약하며 놔두는 건 올바르지 않다. 


아이 엄마라면, 아이가 어지른 것을 '내 시간에' 치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오은영 박사님은 아니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 내가 어지른 게 아니니까 아이가 하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거 네가 한 거니까 네가 치우는 게 좋겠다고 한마디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결국 며칠 뒤에 내가 치우는 날이 오더라도. 그리고 치우더라도 '엄마 시간'에 치우자. 


2. 자기계발을 하자. 

최근에 뜬금없이 토익책을 구입했다. 아이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세일하는 토익 책이 있어서 한번 사본 것이다. 토익 시험은 대학생 때 한 번 본 것 같은데 점수도 기억나지 않는다.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어방송에서 일을 하다가 영국으로 날아가 10년 가까이 살다 온 내 점수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토익이 뭔지 잘 몰라서 문제풀기 편만 사고 듣기평가 책을 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다 맞고 그렇지 않았으니 아무리 영국인 친구와 두 시간을 영어로 떠들어도 알 수 없었던 어려운 문법 체계를 한국에서 만든 문제집을 보면서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리고 희한하게 한 문제만 풀어도 오늘 내가 뭘 했다, 라는 만족감을 준다. 

나처럼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옛날 방식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온라인에도 다양한 수업이 있을 테니 자기계발에 시간을 쏟으면 내가 뭐라도 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거다. 꼭 언어가 아니어도 좋다. 화장실을 고치는 법이나 문고리를 설치하는 방법 등등 알아두어서 나쁠 것이 없는 유용한 정보가 인터넷에 잔뜩 있다. 


3. 건강하자. 

나는 살면서 운동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자랑이냐) 런던에 살 때 임신이 되지 않아 운동을 해보겠다며 Virgin Active라는 짐에 등록해서 다닌 적이 있다. 어느 날 너무 격렬한 운동 후에 사우나를 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앰뷸런스 안이었다. 수영복을 입은 채 구급차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그 이후에 등록한 짐에 가지 않게 되었다. 날 도와준 것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신혼이었다. 지금은 대형견 같은 어린이를 키우고 있고 나이도 있으니 다시 운동을 해야 한다.

 

어젯밤 아이가 물었다. 


"나이가 들면 죽는 거야? 그럼 엄마도 죽어? 죽으면 고스트마미가 되어서 내 옆에 있을 거야? 나는 그럼 언제 엄마를 만날 수 있어?" 


나이가 들면 죽는 거야,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가 점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야 엄마는 안 죽어, 엄청 건강해서 네 옆에 계속 있을 수 있어, 라고 거짓말을 했다. 


집에 운동기구는 따로 없어서(기구를 따로 살 필요는 없다. 집에 공간만 사라질 뿐) 무거운 물통이나 올리브유를 양손에 들고 근육운동을 시작했다. 남편이 집에 없어도 소스병 정도는 내 손으로 딸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오래 살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내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서 갑자기 병이 찾아온다면 그건 내 잘못일 테니까. 내가 내 스트레스 관리를 하지 못해서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건 내 잘못이니까. 



오후 4시가 되면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온다. 


소파 위에는 내가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 폰 화면에는 '문고리 교체 방법'에 대한 동영상이 일시 정지된 상태로, 

식탁 위에는 2L짜리 물병 두 개가 누워 있을 것이다. 


아이가 그걸 볼 것이다. 


"엄마도 일 안 하는 시간에는 

엄마 자신을 위해 뭘 해.

너도 네가 책 읽고 숙제하는 건 

엄마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나"


라고 아이가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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