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eon Apr 05. 2021

네가 레테를 보았어

초1 영어 학원 레벨테스트

네가 한국에 온 나이인 만 5세는 애매하다고 생각하면 애매하고 지금이 딱이라고 생각하면 딱인 그런 나이였어. 너는 '엄마'보다 '마미'가 더 편한 아이였고,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살겠다고 온 건 처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장난감을 사면 '이거 챙겼다가 영국에 다시 갈 때 꼭 가져가자'라고 말하곤 해. 네가 한국에 이렇게 한 달 이상 머물고 있는 것이 처음이긴 하지만 10개월이 되어가는 지금도 다시 네 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너를 보면서 항상 짠하고 미안해. 할머니는 이제 너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다시 갈 계획이 없다는 걸 굳이 말해서 너를 속상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엄마는 안 하고 싶어. 네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겠지 언젠간. 


네 방의 불을 끄고 왔는지 안 끄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며 가끔 물어보는 너에겐 미안하지만 우리는 다시 해외 이사를 할 생각이 없어. 네 방의 불은 네 학교 친구인 아디예니가 매일 아침 켰다가 저녁엔 끌 거야. 당장 집이 필요했던 친구에게 우리집을 빌려줄 수 있었던 것도 그때는 큰 운이었어. 코로나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을 즈음 우리 가족은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고 같은 시간 네 친구인 아디예니 네는 집과 차를 바꿔야 할 처지였지.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되어 차는 팔고 집은 빌려주기로 하고 한국에 왔어. 우리집이 친구집이 되는 순간이랄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너는 아디예니라는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해. '엄마 이 잠옷 누가 사준 거야?'라는 질문에 재작년 네 생일에 아디예니가 준 거라고 하니까 너는 그게 누구냐고 말하더라. 정말? 아디예니를 몰라? 

그러고보니 아디예니와는 집주인/세입자 관계가 된 거라 그쪽에서 불편해할까봐 일부러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어. 영상통화도 한번도 하지 못했지. 통화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은 8시간의 시차도 한몫했을 거고. 다른 친구들과는 가끔 영상통화를 하는데 점점 너의 영어가 자신감이 없어지는 걸 느껴. 언어의 반은 자신감인데. 너의 한국어를 걱정하던 작년 내 모습은 완전히 폭파되고 이제 너의 영어를 걱정하는 한국인 엄마의 모습이 된 거야. 


친구의 이름을 잊고 네가 주로 쓰는 언어가 바뀐 지금, 한국 입국 10개월 만에 초록창에 '영어 학원'이라고 처음으로 검색해보았어. 너는 한국으로 리턴한 것이 아니지만 리터니반으로 가는 게 맞을 거 같았고 그렇게 '레테'라는 것을 처음 예약하게 되었어.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그런 대형학원은 너와 맞지 않을 거라서 (넌 지금도 문화 차이로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현재 2명 밖에 없다는 작은 영어 학원을 선택하게 되었어. 


신발이 다 젖을 정도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주말. 주중엔 수업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레테는 주말에 주로 한다더라. 엄마도 아빠도 영어 학원은 처음이라 아는 것이 없었어. 아 참, 그거 알아? 엄마랑 아빠는 영어 학원을 다닌 적이 없어. 아빠는 어릴 때 유학을 갔고 엄마는 팝송과 드라마 같은 미디어로 영어를 배웠어. 우리집에서 영어 학원은 네가 최초야. 


이 학원은 1호점이 다른 동네에 따로 있고 우리 동네에 있는 것이 갓 문을 연 2호점이었어. 건물에 간판도 없어서 (다음 주에 간판이 도착한대) 엄마가 원장한테 '기획 부동산 사무실 같아 보인다'고 말할 정도였지. 하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다 좋아보였고 갓 열어서 모든 것이 새 거인 점이 좋더라. 알지, 엄마는 이제 빅토리아 시대 엘리자베스 어쩌고 하는 오래된 거 너무 싫어. 영국에서 오래 살면서 나처럼 변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무조건 새 거, 신문물이 좋아. (다른 엄마들은 새집증후군있다고 싫어할 듯)


너는 젖은 발을 하고 무려 한 시간 반에 걸쳐서 레벨 테스트를 받았어. 지금은 거리두기 때문에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어서 레벨 테스트도 집에 있는 선생님과 모니터를 통해 이루어졌어. 엄마 아빠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느라 네가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어. reading, listening, speaking, writing을 검사받는 중이라고 했는데 중간에 선생님이 대기실에 있는 나에게 와서 말했어. 


"아이가 writing을 힘들어 해요. 원래는 잘했었는데 지금은 다 까먹었다면서 연필을 놓네요."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주책맞게 눈물을 왈칵 쏟았어. 아니아니, 공부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레테에 떨어질까봐 그런 게 아니야. 어른들의 상황 때문에 언어를 바꿨어야 했고 친구를 모두 잃었고 심지어 모국어까지 잘 못하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불쌍하고 미안해서 펑펑 울어버렸어. 너도 안 울었는데 내가 말이야. 아이고 어머니 왜 우세요 하면서 휴지를 갖다 주는 선생님을 붙들고 괜히 민망해서 '애가 불쌍해서요 흑흑흑'라고 하소연을 했지 뭐야. 



저희 아이는요, 9월생이라서 같은 반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아이였어요. 아시다시피 영국은 9월에 학기가 시작되잖아요. 다음 해 8월에 태어난 아기 같은 애들이랑 같은 반이었던 거죠. 그러니 큰누나처럼, 왕언니처럼 늘 자신감이 있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뭐든 빠른 아이였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같은 반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 안에 속상함이 가득할 거예요. 처음엔 '나 이거 영어로는 아는 건데.'하다가 지금은 '나 이거 영어로도 모르네..'가 된 거예요.  



못하겠다고 연필을 내려놓으면서 처음 본 사람에게 나 원래는 잘했었다..라고 말했을 네 모습이 떠올라서 엄마가 울어버렸어. 아우. 주책. 창피해서 이 학원 못 다니겠다, 그치. 


그래도 다른 걸 괜찮게 하니까 (아니면 여기는 어차피 그냥 학원일 뿐이니까)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다시 많이 나아질 거라고 위로하는 원장의 말은 네가 붙었다는 뜻 아니겠어? 별 것도 아닌 것에 할머니는 '우리 손녀 합격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까지 보냈더라. 우리 가족 왕주책주책. 한달에 320파운드를 내면서 한국에서 '미국 영어'를 배울 거라는 말은 영국 친구들에겐 못하겠다. 충분한 사전지식이 있어야 이걸 이해할 것 같아.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기대가 돼. 말로만 듣던 한국의 영어 학원 진출이라니! 너의 영어가 이 학원을 통해 앞으로 어디로 튈 지 너무 궁금해. 한 달 다니다가 못 다닐 수도 있고 몇 년을 다니다가 이사를 갈 수도 있겠지. 꼭 이렇게 되어야만 해, 라는 건 없으니까 한번 해보자, 우리 딸. 한 시간 반 동안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어줘서 고마워.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