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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gie Oct 10. 2015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요즘 나는 생각이 부정적이다.


TV에 어떤 친절한 사람이 웃는 얼굴을 보이면, '실제로는 저렇지 않을 거야. 카메라가 꺼지고 카메라맨이 떠나면 저 사람도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남 뒷담화도 하고 사소한 일에 언성을 높이기도 할 거야.' 하고 생각한다.


또 인터넷 기사나 뉴스를 통해 누군가가 선행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사람들의 칭찬과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면, 난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 사람보다 더 자주 선행을 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다른 사람이 받을 칭찬의 몫까지 다 받는 것 같아서 저 사람이 미워지기까지 한다.


어릴 때는 너무 긍정적이어서 탈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싫어하는 애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저 애들은 내가 너무 잘나서 샘이 나서 저러는 걸 거야 하며 그저 웃어 넘겼다.


엄마가 나를 긍정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에서 긍정적인 의미, 행복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항상 내게 조언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두려워할 때, 다 너 같은 마음일 거라고, 그럴 때는 네가 먼저 다른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엄마 말은 항상 맞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아이들은 대부분 기꺼이 나를 받아들였고 금방 친구가 되었다. 가끔 물러서는 애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애들도 사실은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딱히 나를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항상 웃고, 나를 싫어하는 애들한테도 밝게 대해서 그런지 학년이 끝나갈 때 즈음엔 나를 싫어하는 아이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항상 나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도 사춘기가 왔다.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갈 때 즈음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진짜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를 좋아할까? 원래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런 생각들은 내가 자신이 없어졌다는 의미 아닐까? 그런데 대체 왜?


그러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졌던 것 같다. 내가 친구로 생각하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지, 나는 나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롭기만 한 건지, 혼자만의 착각인 건 아닌지.  난생처음 겪는 고민과 생각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런 고민을 하기 전까지 나는 너무 행복했다. 내가 하는 일마다 잘됐고, 공부든 운동이든 항상 1등을 다퉜었다. 선생님들에게도 착하고 말도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나있었고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께도 예의 바르고 똘똘하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늘 가슴이 충만한 느낌이었고,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하며 매일을 살았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이후로 내 삶에 가장 큰 변화였다. 중학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앞으로 공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너무 고민이 많았다. 내가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변화와 중학교 입학이 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가 너무 만족스러웠고, 이게 중학교 올라가서도 여전할지 걱정이 되었다. 동시에 내가 살던 삶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을 파고드는 것을 좋아했었고 그 습관이 나를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줬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생각은 정말로 멈추지 않았다. 난 중학교에 올라가서 굉장히 불행한 생활을 했다. 여전히 겉으로는 밝고 사교적이었지만 속으로는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며, 너무나 변해버린 내 마음이 당황스럽고 초조했다.


늘 그때 느낀 일촉즉발의 감정들과 생각, 고민들을 정리하고 표현해보려고 하지만 항상 실패하고 만다. 아마 그것은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상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당히 격렬한 감정과 생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대 남자, 여자는 무엇인가, 자존심 등 자극적인 감정들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생각까지 어느 하나 빠뜨린 주제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중학교에서는 학교 생활하면서 같은 반 애한테 맞아도 봤고, 같은 반 여자애들한테 무시도 당해봤다. 솔직히 죽고 싶은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나를 그나마 다독였던 생각이, 어쨌든 이 시간도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는 생각이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든 간에, 그래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이사를 하게 됐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로 옮기면서 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더 이상 자존심이 무너졌다가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순수한 채로 성인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서, 나는 어쨌든 누구에게든 책잡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착해서 트집 잡을 일이 전혀 없기를 바랐다. 남자 중학교에서, 어쨌든 누구든 나에게 시비를 걸거나  해코지해서 내 자존심이 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반 청소도 나서서 하고,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했던 것 같다. 튀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냥 오직 내 할 일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이 많이 신경 써주시고 예뻐해 주셨다. 그런데 딱히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에게 칭찬받는 모범생이라는 게 좋기만 한 일인지, 어쩌면 가장 남의 눈을 의식하고 항상 바른 듯 가장하는 거짓말쟁이는 아닌지 여전히 고민이 많았다. 반 친구들을 넘어 학교 전체 동급생들에게 착하고 성실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난 별로 감흥이 없었다.


내 바람대로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거나 나를 깎아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으나, 착한 사람 코스프레가 너무 답답해서 벗어던지고 싶을 때마다 나의 본능을 억누르는 게 또 하나의 일이었다.


슬프게도 난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일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대단할 뿐만 아니라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생활에 의문이 자꾸 고개를 들 때마다 차라리 이게 나은 거라고 다시 마음을 가라 앉히고, 다시 의문이 들고 매일을 매번 반복했다.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지쳐서 생각을 그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왜 사는 건지 모르겠던 나는 다시 생각을 하게 되곤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크게 다른 것 없었다. 여전히 스스로를 억제하는 데 힘을 쏟고, 학교 동급생들 눈치를 보고, 동시에 공부에도 손을 놓지 않고서 매일을 버텨냈던 것 같다. 가끔 친구들이 다가와도 자꾸 내가 거리를 둔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친구 관계를 맺는 게 얼마나 서로에게 고통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상처 주지 않고 친구를 거부하는 게 또 하나의 신경 쓸 일이었다.


이사를 온 후의 4년 동안 학교 생활은 확실히 이사 오기 전 2년의 중학교 생활보다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즐겁지도 않았다. 어쨌든 덜 고통스러운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4년 동안 재미없게 지냈다. 나는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 중상위권 대학 좋은 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꿈꾸던 좋은 대학교에 갔다.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해도 4년 동안이나 내가 지켜온 습관이 바뀌지는 않더라. 여전히 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무서웠고, 여전히 거리를 뒀다.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억지로 했던 공부는, 대학교를 들어오자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대학교를 다닐 이유를 잃어버렸다.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수업도 열심히 안 듣고. 솔직히 수업도 고등학교랑 크게 차이는 없는 것 같고.


1학년 1학기는 대학교가 뭔지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2학기 개강, 나는 학교에 잘 안나가게 되었다. 좋은 대학을 위해 오랫동안 버틴 이유가 고작 이 정도인 건가 하는 배신감과, 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는 수업을 듣기 위해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야 하는 이유도 몰랐기 때문이다. 휴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반응이 두려웠지만, 어쨌든 난 더 이상 하기 싫은 걸 하기 싫었다.


결국 난 2학기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말렸지만, 이미 내 결심이 선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되고 나서도 곧장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릴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한 3개월 동안 거의 지내던 방 안에서만 지냈던 것 같다. 가끔 대학교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서 술 마시고, 다시 방에 돌아와선 자고. 2주 동안 방에만 있다가 한 번 술 마시고 이런 생활을 반복했었다. 술이 아니면 친구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가족이 내가 학교를 나가지 않는단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나는 1년 휴학계를 냈다. 다행히 사유도 물어보지도 않고 쉽게 휴학이 되더라. 그게 작년의 일이다. 그리고 올해 나는 우리 집에만 있다. 학교도 안 가고, 군대도 안 간다. 가끔 가족들이 억지로 끌고 나가야만 나는 밖으로 나간다. 그 외에도 마트 갈 때, 심부름할 때 나간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가족들은 알바라도 하라고 말한다. 집에만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답답하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다고,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나를 자극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생각해보게 된다. 또 삶을 스펙이라든지 경험이라든지 하는 것들로 꽉꽉 채워야 한다는 말들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경험이다. 알바나 자격증만 경험이 아니다.


또 사람인지라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경제활동이나 공부는 하지 않지만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과 생각은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이런 연출은 좀 아쉬운데, 이 영화는 왜 평론가들에게 저평가를 받았을까, 저 연기는 좀 부자연스러운데 등 많은 고민을 한다. 나는 연예 쪽에 관심이 있어서 만약 내가 영화계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애초에 관심도 없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이런 게 낫지 않을까?


솔직히 나도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내가 답답하다. 그러나 내가 일단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백이면 백 한계를 깨닫고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해진 답과 다른 생각은 아무 쓸모도 없으며 아무 가치도 없는 헛된 일이었다.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선생님들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았다. 결국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선생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에 항상 포기하게 됐다.


그런 자신에 대해 몇 번이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뭐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건지. 그러나 부모님부터도 언제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다며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건 어린애 같은 발상이라며. 나에게 언젠가 현명한 조언을 해주고 용기를 줬던 부모님을 거역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무언가 바꾸려는 시도는 늘 나에게 고통만 안겨줬었기 때문에, 나를 가둔 틀을 깨고 새로운 걸 도전한다는 게 너무 무서워졌다. 도전이 무섭다. 어릴 때는 무얼 하든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말은 해도 그게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늘 가슴 한 켠에 존재한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되돌아보면 어릴 때 믿었던 것들이, 엄마가 해주던 말들이 사실은  부질없고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든다. 근거도 뿌리도 없으면서, 그저 미래가 두려워서 하는 말들. 하늘에 맡긴 다는, 어쩌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태도. 그러면서 어릴 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사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위인들이, 정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하기만 한 사람들일까. 나는 생각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걸까, 아니면 사실은 미화된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 걸까.


요즘은 세상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먼저 의심하고는 한다. 그러다 보면 권위와 미사여구에 가려진 치부가 조금씩 보인다. 그러면서 나와 사람들을 기만하는 그 권위와 자만에 경멸과 배신감을 느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기 때문에 나는 자꾸 논리적으로 의심하는 연습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예전보다 부정적이다. 모든 게 아름답고 모든 게 정답을 향해 걸어간다고 생각하던 환상이 깨졌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적나라한 진실보다는 그럴듯한 거짓을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조금 불쾌하다고 해도 사탕 발리지 않은 발가벗은 진실을 보고 싶다. 더 이상은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거짓말들에 속고 싶지 않다. 거짓말쟁이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눈을 가린 긍정보다는 안대를 벗으려는 부정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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