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ggie Nov 10. 2015

나의 수능 이야기

2년 전

나도 정확히 2년 전 수능을 봤었다. 수능 보기 전날 잠을 충분히 자 두는 게 중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잠에 들지 못하는 동안에 나는 굳이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나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할 정도로 수능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였다. 수능이 당장 내일이라도 나는 입시라는 것에 나를 제어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수능 전날까지도 수능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다. 문제를 몇 개 맞추는지로는 학생의 가치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며. 여태까지 시스템을 따랐으면서 이제 와서 저항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1교시는 국어 과목.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르지만 망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공식적인 시험에서 내가 받아 본 점수 중 가장 최악이었다. 채점을 끝까지 안 해서 정확한 점수는 기억이 안 나지만 80점도 못 넘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국어가 위태로웠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늘 시간에 쫓겼다. 다행인 건지 모르지만 그래도 항상 점수는 나쁘지 않았고 1등급 아니면 2등급만 받아 봤다. 이번엔 2등급도 어려울 것 같았다. 두 세 지문을 아예 읽지 못했고 그래서 일곱 문제 정도를 찍었다. 평소엔 선택지를 좁히고 찍기라도 하는 데 이번엔 그냥 다섯 개 중 하나로. 아, 난 여기까지구나, 하고 생각했다.


쉬는 시간 20분을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 멍하게 있다가 2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시험지를 받고, 로봇처럼 아무 생각 없이 2점 짜리 문제들을 푼다. 오, 빠르다. 그 다음은 3점 짜리 문제. 너무 쉽다. 3점 짜리에서도 가끔 막히는데 오늘은 순탄하다. 4점짜리 문제도 역시 쉽다. '만점 많이 나오겠구나.' 그런데 마지막 두 문제는 바로 풀지 못했다. '애써 풀어야 하나?' 이미 이번 수능에서 내가 목표한 바는 물 건너 간 것 같은데 굳이 머리를 쥐어 짜내야 하는 걸까. 남은 30분 동안 그냥 가만히 있었다. 마지막엔 그래도 맞추는 게 나을 거 같아서 한 문제는 대충 풀었는데 결국 둘 다 틀렸다.


뭐 수학 문제를 풀다 보니까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아, 그래도 내가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공부를 하긴 했구나. 하지만 만회하려고 해도 국어 성적이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2등급도 힘들 것 같았다. 논술 시험도 봐야 해서 최저 2등급은 넘겨야 하는데. 나는 이번 수능은 포기하는 게 나은 건지도 몰랐다. 재수는 생각하기도 싫고, 이번 수능으로 나는 공부의 길이 아닌 걸 깨달았으니 이걸 계기로 내가 늘 하고 싶던 가수의 길을 걸을까. 역시 2교시까지의 시험을 망친 같은 시험장 친구의 슬픔을 위로하며, 잘 넘어가지 않는 엄마의 도시락을 억지로 삼켰다.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가 실망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나는 단 한 순간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을 산 적 없다며 자신을 방어했다. 사실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을 때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애썼다. 그거면 된 거다. 게다가 수능을 망쳤다는 건 내게 맞는 다른 길을 찾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의 기대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고, 나는 그 중압감이 꽤 무거웠다. 사실 가끔은 짜증이 났다. 엄마가 기도하거나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는 건 내 성적에 전혀 도움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게 부담을 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무기력한 몸을 이끌고 3교시 시작 종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영어.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 수준은 교육 과정을 한참 뛰어넘는 곳에 있었는데, 이제 난 손을 힘껏 뻗어야 닿을 듯 말듯 한 위치에 있었다. 비교적 약한 듣기 평가는 다행스럽게도 무난히 넘어갔다. 23번 읽기 지문을 보자 마자 수학 시간에의 자신감은 사라졌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잘 안 읽혔다. 그렇다. 나는 평소에도 글을 가까스로 읽는 난독증이었던 거다. 검은 건 글씨, 흰 건 종이. 그래도 답을 찍는 건 지문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였기 때문에 어찌저찌 시간 안에 문제를 모두 풀었다.


4교시는 사회 탐구. 나는 사회 문화와 한국 지리를 골랐다. 모두 사탐에서 인기 과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나마 쉬워서였나? 사회 문화는 문과라면 기본적으로 아는 주제들이 많아서 비교적 쉽게 공부했던 것 같다. 문제는 한국 지리를 3학년 때 처음 접했는데 이건 완전 신세계였다. 그래도 3학년 때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으로 수능을 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3학년 동안 한지를 열심히 공부했다. 한국 지리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 10분에는 늘 50분 동안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을 복습했다. 아마 고등학교 3년을 통틀어 한국 지리를 제일 열심히 했을 거다. 어쨌든 사탐 성적은 둘 다 좋게 나왔다.


제2 외국어 일본어는 그냥 시험지만 받고 멀뚱히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제2 외국어를 보지 않고 시험장을 빠져 나오려 했지만 학교 측에서 허락해 주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시험이 끝났다. 나는 어느 커뮤니티에 올라 온 수능 후기나 뉴스에서의 인터뷰처럼 슬픔이나 허무함, 혹은 해방감과 같은 감정이 크게 밀려오는 경험은 하지 않았다. 그냥 담담했고, 그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 생각했다. 솔직히 대학 입시를 위한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지만 나를 힘들게 한 고민과 삶의 문제들은 수능이 끝났다고 같이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공부 말고도 인생에 고민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었었다.


가채점을 통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성적표가 나왔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국어만 망한 게 됐다. 국어 과목 이후로 거의 자포자기해서 시험을 쳤는데 다행히 수학, 영어, 사탐 모두 1등급이었다. 그 정도면 잘 나온 게 아니냐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백분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수학과 한국 지리는 1등급 경계에 턱을 걸었다. 게다가 수능 전 마지막 9월 전국모의고사에서 전 과목 2개 틀린 나로서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9월엔 연세대 심리학과도 내 밑에 있었는데. 그래도 수능을 아주 망친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평소에 심리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취직이 힘들기도 해서 2순위로 경영학과를 맘에 두고 있었다. 학교는 어쨌든 배치표에서 높이 있을 수록 좋은 학교. 내 표준점수 합은 517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좋은 학과 기준으로 경희대, 시립대, 동국대 등이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써볼 만했다. 그 중에서도 국어 반영 비율이 가장 낮은(20%) 시립대 경영학과가 가장 끌렸다. 반값 등록금까지, 지금 내 성적으로 최선은 여기였다. 담임선생님은 확률이 높지 않다며 안정 지원을 권유했지만, 난 시립대 경영학과가 아니면 맘에 드는 곳이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대학은 가고 싶은 맘이 없었다.


최초 합격 실패. 1차 추가 합격 실패.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 됐다. 2월 초순에서 중순으로 넘어갈 쯤, 2차 추가 합격 명단에 들었다. 훗,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군, 뿌듯해 하며 시립대에 등록금을 예치하게 됐다. 1,020,200원이던가. 꿈꾸던 중앙대나 성균관대 심리학과는 가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성공한 입시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뭐 비록 지금 휴학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입학한 학교를 보면 뿌듯하다. 어른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쨌든 나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고통을 참고 애쓴 결과. 전부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내 삶에 대한 애정, 의지의 증거.


써놓고 보니 자랑이다. 자랑 맞다.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하버드나 프린스턴, 아니면 하늘의 학생들이 보기엔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토록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도 현실적인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했다. 비록 성적은 최상위가 아니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또래의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통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정신 승리일지도 모르지만 내 정신은 승리할 자격이 있다. 비록 힘든 내색을 거의 하지 않아 나의 스스로에 대한 인정을 가족들이 무시할지라도, 나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고등학교 3년 동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잘 해냈다, 나.

매거진의 이전글 너 그렇게 살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