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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Oct 18. 2017

당신의 심장 소리

섬에서 절반 #4 데시마

카라토 항 근처에는 2개의 작품이 있다. 하나는 <No one Wins -Multibasket>이라는 작품으로 하나의 농구 골대에 여러개의 링이 달려있는 작품이다. 우리 말로 바꾸자면 '승자가 없는 멀티 농구' 정도 되려나. 아무튼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각각의 룰로 즐기는 농구를 할 수 있도록 의도한 작품이라고 한다. 하다못해 고스톱을 쳐도 "우리 동네에서는 이렇게 안하는데?"하는 투닥거림이 벌어지는 판에, 아예 제로 베이스에서 우리끼리 규칙을 새로 만들고 시작하는 게임이라니! 간단하면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다. 


물론 누구나 직접 체험해 볼 수 있게 농구공도 준비되어있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농구공을 만져봤다. 그런데 문득 작품명을 왜 이렇게 지었을지가 궁금해졌다. 어차피 비슷한 의미일텐데 그럴바엔 '승자가 없는'보다는 '패자가 없는'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勝者はいない─マルチ・バスケットボール / No one wins – Multibasket>


한참을 더 걸어 이길이 맞나? 싶은 숲길을 지나 외딴 바닷가에 다다르면 또 하나의 작품이 나타난다. 데시마의 여러 작품들 중 꽤나 유명한 작품인 <심장 소리의 아카이브>다. <심장 소리의 아카이브>는 세계 각지 사람들의 심장 소리를 모아서 녹음해 놓은 작품으로 관람객은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누군가의 심장소리를 끊임없이 듣게 된다. 방 한쪽 벽에 걸려있는 스크린을 통해 그 심장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름이 뭐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등의 간단한 정보를 엿볼 수도 있다. 


평소에 '심장 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심장 소리도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 원하는 사람은 추가 비용을 지불하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녹음해 <심장 소리의 아카이브>에 추가시킬 수도 있는데, 나의 심장 소리가 작품의 한 부분이 된다는 점에서 이도 나름 의미있는 일인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의 심장 소리도 몇몇 등록되어있는걸 확인하고보니 역시 발빠른 사람들이 있었구나 싶은 기분도 들었다.


심장 소리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 곧 생명의 증거이다. 사실 데시마는 70년대부터 10여년간 산업 폐기물이 불법으로 매립됐던 과거가 있어 한 때는 '쓰레기 섬'으로까지 불렸던 곳이다. 이후 주민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유해 환경을 개선하고 폐기물을 재처리하면서 다시금 생명력을 되찾은 곳이기에, <심장 소리의 아카이브>가 여러 섬 중 하필이면 데시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그저 단순한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心臓音のアーカイブ/Les Archives du Coeur>


이 작품이 좋은 것은 이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건물이 외딴 바닷가에 홀로 세워진, 꽤나 운치있는 나무 건물이라는 점도 있다. 사실 우연히 산책을 하다가 이 쪽까지 오기는 쉽지않을 것 같고 이 쪽까지 오겠다 작정을 해야만 올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작품들과 제법 떨어져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매우 한적한 편이다. 


사람도 배도 없는 조용한 바닷가를 바라보며 바닷 바람을 쐬고, 데시마 미술관부터 <승자가 없는 멀티 농구>를 거쳐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열심히 일한 내 심장이 내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카라토 항 쪽으로 되돌아오니 아련한 눈빛을 발사하는 귀여운 강아지가 있어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카라토 항에서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처음에 배에서 내렸던 이에우라 항 쪽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이제 근처의 구멍가게에서 초코 민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으며 엄청난 배차 간격의 셔틀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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