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절반 #16 오기지마
「만화경 블랙&화이트」
언덕을 거의 넘다시피 오르면 나타나는 집. 마당에선 바다가 훤히 보이고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는 커다란 망원경이 하나 설치되어있다. 그런데 망원경을 들여다보니 바다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서 형이상학적인 무늬들이 춤을 춘다. 다시 보니 망원경이 아니라 만화경이다.
만화경 안의 조그만 조각들 때문에 훨씬 더 커다란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럴거면 만화경을 굳이 왜 이 집에서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두었을까. 어쩌면 '시야라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구나, 어디에 서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보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구나' 를 깨닫게 하려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깊은 생각 없이 '여기가 널찍하니 좋네, 여기 놓자!' 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쪽도 이 쪽대로 의사 결정이 시원시원해서 좋다.
마당을 지나쳐 들어선 집 안은 만화경의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 보이던 화려한 무늬들로 가득해 마치 만화경 안으로 들어온 듯 한 인상을 줬다. 대리석이나 화강암 덩어리 같기도 하고 검은 잉크가 번지는 모습 같기도 하고 옛날 TV가 지직지직 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자글자글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늬들이었다.
「아키노리움」
건물의 1층에 설치된 스크린에선 끊임없이 어떤 물건들의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여기에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며 내는 맑은 소리, 나무로 된 대롱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방울 소리 등 청아한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가 된다.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며 기분이 좋아지던 작품. 계단을 통해 2층 다락으로 올라가면 그림자의 실제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는데 늘 그렇듯 실제보다는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훨씬 앙증맞고 예뻤다.
사실 이 작품을 사진으로 소개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눈으로 보여지는 영상보다도 음향이 더욱 압권이기 때문. 듣고 있으니 편안하다 못해 나른해지는게 요즘 유행하는 ASMR로 사용해도 좋을 소리들이었다. 1층과 2층 할 것 없이 건물 통채로 들어내 배에 싣고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심란한 날에 조심스레 꺼내어 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하면 약간은 공감할 수 있을까.
<アキノリウム / Akinorium>
「자전-공전」
작품들은 빈 집의 빈 공간, 이를 테면 방이라든가 부엌이라든가 화장실이라든가 하는 곳들에 설치되어있었다.
작품들의 형태는 제각각 다르지만 크게 보면 '지금은 제 기능을 잃은 낡은 물건들을 뼈대로 연결해 모터로 빙글빙글 돌리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제 기능을 잃었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지는데 정말로 고장이 나 작동을 하지 않아서, 라는 의미 이외에 더 이상은 이 물건을 사용할 주인이 없어서, 도 포함하는 것 같다. 아주 오래 전에는 당연한 물건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없는 물건들, 그리고 충분히 지금도 쓰려고만 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은 물건들이 뒤섞여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
괴이한 모양새의 작품에 달라붙은 '위잉' 하는 모터 소리는 적막을 깰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거슬리는 소리였다. 이 작품의 이름은 <자전-공전>. 사실은 지구가 도는 동안에도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이런 소리가 나고 있는걸까.
작품을 뒤로 하고 방을 빠져나오니 바깥 세상은 몹시도 평화롭다. 마치 우리가 평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지 못하듯. 세상이 쉬지 않고 돌고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세상은 이토록 고요한데? 를 반문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