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가 취향이라서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사수 에세이

부장님, 어제는 집에서 푹 쉬셨어요?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와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딱히 할 말이 없으면 보통 동료들은 어제오늘의 안부를 묻는다.

어제 뭐 했어요, 아침은 챙겨 드셨나요.

이것의 시작은 보통 나에서 먼저 출발하는 편인데 일종의 장유유서의 원칙 같아서 먼저 발언권을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딱히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지라 '어제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간단히 차려 먹고 아이와 준비물을 챙기고 목욕을 하고 책 읽기 시간을 거쳐 간단히 일기를 쓰고 같이 누워 내일의 소원을 빌었다'라고 답하니 갑자기 이런 반응이었다.


부장님은 집에서도 모든 면에서 철저하실 것 같아요.


내 답변 중 어느 지점에서 그렇게 느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되물었다.

"다들 이렇게 지내지 않아요?"

그 순간 우리 부서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은이 님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혹시 성격 유형 검사해 보셨어요?"



"아 그거 MBTI 맞지요?"

싫은 사람 빼고는 한 번쯤 해보는 성격 유형 검사 아니냐면서 이미 자가 테스트를 해봤다는 사람, "내가 해본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하며 누런 눈으로 은이 님만 쳐다보는 나 같은 사람까지, 반응이 다양했다.



주문한 음식은 여전히 조리 중인 듯하여 딱히 특별하지도 않은 안부 묻기는 그만하고 "각자의 MBTI 까기"로 주제는 정해졌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인 게, 휴대폰으로 간단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료 테스트 프로그램은 단 1분이면 성격 유형을 검사할 수 있었다. 은이 님이 보내준 링크를 통해 수십 가지의 질문에 답을 골라 내려갔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어서 답을 고르기가 어렵다는 반응도 있었으나, 나는 대부분의 질문에 1초 이상 고민하지 않고 답을 선택했다. 결과가 나왔다.



ENFJ,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계획 짜길 좋아하고 질서 정연하며 조직적인 세계를 선호하는 유형이란다. 그밖에 다양한 특징이 있는데, 계획적이라는 말에 밥동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거 완전 부장님 이야기네요! 계획 짜기와 완벽주의, 그 자체이시잖아요.



한 명이 이렇게 말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MBTI 테스트는 진리라고 맞장구들을 쳤다.


사실 나도 내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늘 일정을 관리하고 미리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기에 (사실은 거의 계획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 유형 결과를 보며 '이것 참 꽤나 그럴싸한 테스트'라고 생각했다. 딱히 비밀도 아니고 하니, 궁금하든 안 궁금하든 나는 내 성격 유형을 공개했고 모두의 열렬한 동의?를 얻어 완벽주의자로 선고받았다.



그날 이후로, 나의 행동과 성격에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스스로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성격 유형 결과를 받긴 했지만, 공식적인 시험이 아닌 간이 테스트 프로그램이고, 재미 삼아해 본 것이기에 어쩌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단 다이어리를 꺼내 이렇게 적었다.

'점심시간 직전에 오전 시간의 내 행동을 정리해볼 것.'

새롭게 추가된 미션은 상당히 흥미롭고 설레기까지 했다.


11시 55분.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미션을 수행할 것'. 절반 조금 덜 미치지는 일과의 지점에서 나는 냉철하게 펜을 들어 중간 평가를 시작했다.
8시 40분 - 사무실에 도착하여 먼저 물티슈로 책상을 닦고, 노트북 전원을 누름과 동시에 곧바로 논스톱으로 화장실에서 향하여 손을 씻고 탕비실로 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뽑아 정확히 컵 높이의 1cm를 남겨둔 부분까지 정수를 부어 연하게 완성된 커피'물'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8시 50분 - 노트북 로그인 후 가장 먼저 오늘의 일정을 확인한다. 9시에 회의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9시 10분까지 하루의 일과를 다시 정리한다. 예를 들어, 10시에 회의가 있는 경우, 9시 45분부터 55분까지 회의자료를 검토하는 일정을 추가한다. '할 일'이라는 이름으로 넣고 상세 내용은 링크로 대신한다. 9시 55분까지 반드시 검토를 마쳐야 하는데, 그 이유는 회의 시작 전에 화장실을 미리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11시 30분 (5분~10분) - 주로 부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편이라 이 시간에 누가 약속이 있는지, 밥을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간단히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점심시간은 12시 전후로 시작하고 알아서 자율적으로 점심시간을 시작하고 마칠 수 있는 회사 내 분위기 덕분에(우리 회사 최고), 밥을 나가서 먹을지 배달받아먹을지 등의 의사결정을 빠르게 마치는 일정을 넣을 수 있었다.
11시 50분 - 이런 나의 오전 일과를 적으며 거울 보듯 하루의 전반전을 시청하는 시간이다. 미션을 잘 수행하여 기쁘다.


내가 적어놓은 '오전의 나'를 읽고 나니 지난번 MBTI 결과를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유치한 심리테스트 같은 결과라고 웃고 넘겼다. 그러나 미팅 시간 10분 전부터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하는데.. '하며 마음이 불안해지는 고질적 습관의 원인이 '계획 집착증'쯤 되는 희귀병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타고난 성깔이 그러합니다'라는 말을 조금 '있어 보이게' 표현해준 Myers-Briggs라는 분(사람의 이름이 맞는지 확인을 해보지는 않았다)께 감사하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면 어디를 가서도 '나 ENFJ, 완벽주의자야'라고 미리 고백하기 편하고, 남들이 하나쯤 갖고 있다는 아바타 혹은 부캐 정도로 데리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매년 초 이만 원씩 주고 구입하는 다이어리 쇼핑'짓'에 그럴싸한 과학적 근거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성격이라 하자니 좀 애매하고, 취향이라고 하자.


전혀 완벽하게 해온 게 없는데 완벽주의를 성격이라 하니 뭔가 잘못된 기분이다.

성격이라 함은 개인이 가진 고유의 성질 혹은 품성이고* 선천적인 것이어서 바꾸기 어려운 것인데, 사실 그 정도라고 할 것은 아니다 싶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학교를 다니기 전까지 나는 하루가 어찌 굴러가든 그저 동생에게 간식을 뺏기지만 않으면 행복한 아이였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내 옆에 있으면 마냥 기분 좋은 소녀였다. 한국에서 아이가 소녀로, 소녀가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많은 경쟁과 눈치게임이 나를 완벽 중독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성격이라 하기에는 너무 순수했고,

내가 가진 기질이라고 하기엔 '완벽'의 무게가 낯설고 하니, 완벽주의는 그냥 맘에 드는 내 취향이라 해두기로 한다.

그게 좀 더 완벽한 단어라서. 이게 내 취향이라서.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검색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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