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기에는 결말이 없어

완벽주의 워킹맘의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미리 보기에는 결말이 없어" - 나의 아버지가 TV 보시다가 툭 하고 던지신 말



짤막한 이야기를 만드는 걸 즐겨하는 아이는 한 번에 이야기를 다 들려주는 법이 없다.

“엄마, 나 지금 뭐 그렸게요?~”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내가 힌트 하나만 달라고 애걸복걸하면 씨익 웃으며 잠깐 기다려 보란다. 잠시 끄적끄적 적더니 짜잔 하며 공책을 내민다.

이건 예고편이니 쓸만한 힌트가 될 거예요.

어깨를 으쓱거린다. 인심 많은 꼬마 아가씨로부터 건네받은 짧은 이야기 조각은 나의 추리 본능을 자극했다. 그리고 한 조각 이야기를 덥석 집어 들면, 늘 그랬듯이 나는 또 다른 조각을 기다리며 상상 속 대 모험을 준비했다. 위대한 여정을 마음에 품은 꼬마 작가는 침 삼키는 순간도 아까운지 숨을 꼴딱거리며 열심히 줄거리를 읊었다.


나는 작가의 야심 찬(?) 작품을 미리 엿보는 게 재미있어 조금 더 알려달라 조르고 보채 보지만 더 이상 에누리는 없다. 기약은 없지만 나는 설렘 한 스푼 넣어 기다림 한 잔 마시며 독자의 예의를 갖춰본다.



즐거움이든 절망이든, 다음 이야기는 늘 궁금하다.


아이가 준 힌트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나로서는 꿀잼 포인트다. 아무 정보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궁금한 채로 기다리는 것은 고역이다.

특히 결말을 상상할 때 주로 최악을 먼저 떠올리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최악의 상상이 실제로 결론으로 이어질 거라는 걱정에 기다림을 더욱 고통스럽게 여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내가 아무런 대책 없이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생각에, 최악의 상상을 한결 업그레이드하며 최, 최악을 우려한다.

그리고 악랄한 결말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혼자 만든 결말에 취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음을 깨닫고 무작정 세상을 증오한다. 고백컨데, 증오는 내가 가진 가장 손쉬운 방패이고 소심한 공격이다.



나에게 시간은 다음 상황을 대비하는 자원이다.



'대비'라는 단어는 마치 재난 상황, 혹은 어떤 위기를 대처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다음 단계에 대해 미리 예상할수록 '대비'의 대상은 부드러워진다.

신용 대출을 받을 당시 은행에서 미리 알려준 변동 금리에 대한 안내 사항이 그러했다. 대출 금리는 낮을수록 좋지만 금리가 오를 수 있다는 직원의 설명에 나는 최대 얼마나 오르는지 추가 설명을 부탁했고 2년 후 금리가 껑충 뛰었을 때 생각보다 내 기분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를 게 올랐으니 이제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삶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 어디선가 들은 말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살면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대학 시절, 플래너에 빼곡히 일과 계획을 세우며 내일은 이럴 것이고 모레는 이럴 것이라며 꼼꼼히 메모하는 내게, 대학 선배가 말했다. 세상에 단 하나 깨지지 않는 진리는 모든 생명은 죽는다는 사실 뿐이라고. 그것을 제외하고는 맞는 건 하나도 없고 단정할 수 없다고.


몇 시간 동안 열심히 시간표를 그리는 나에게 어찌 그런 말을. 선배가 미웠지만 맞는 말이었다. 2000년을 앞둔 어느 겨울날, 세상이 어떻게 될 거라는 무수한 예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여 전화를 걸어 묻고 걱정을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예측은 그냥 예측일 뿐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어떤 힌트라도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매 순간 미리보기를 켜놓고 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주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 없이 되돌려 본다. 미리 보기는 다시 보기가 되고, 때로는 되돌리기라는 후회로 반복된다. 어쩌면 미리 보기 어느 한 구석엔 ‘되돌리기 없음’이라는 자막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건강검진을 받고 오셨던 2020년의 여름을 기억한다.

검진 날 용종 조직을 떼서 검사를 추가로 했다는 의료진을 기다리며 말씀하셨다.

“굳이 대장내시경 검사 결과는 보호자가 대신 와서 들어야 한다고 그러네.”


의사는 대장암일 확률이 높지만 정확한 진단은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순간 나를 스쳐간 미리 보기는 좋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용종이 대장암일 확률을 검색했다. 확률은 확률이잖아. 검색 결과 중 내가 기대하는 내용 위주로 찾아서 보았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나와 우리 가족은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며 서로 안심시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날 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불안을 잠재울 확실하고 정확한 미리보기가 필요했다. 검색 결과 중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내용들은 애써 외면해보지만 그럴수록 안 좋은 사례들이 눈에 밟혔다. 참지 못하고 그중의 몇 개의 글들을 클릭하여 읽다가 꼬박 밤을 새웠다. 그렇게 매일 밤 눈을 감은 채 간절히 바라는 내용의 예고편을 만들며 기도했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안타깝게도 진단명은 대장암이었다. 확률이라는 녀석은 나를 실망시켰고 나는 몇 주의 밤잠을 뒤척이며 또 세상을 증오했다.




미리보기는 결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 혹은 대반전이 숨어있든, 이야기의 끝은 절대 미리 알 수 없다. 그것이 미리보기가 가진 밀당이다.

하늘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를 준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을 무척 좋아하지만 준비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인생사는 본방을 사수해야만 비로소 마주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끈질기게 시간을 붙잡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 철저히 무장을 하지만 기대는 무너지고 결론은 잔인하다.


마음은 조급하고 진작 되었어야 할 일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빨간 펜으로 더 이상 의미 없는 항목들을 관통하는 두 줄을 긋는다. 노력은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그래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다신 보지 말자는 단호함이다.


아빠를 볼 때마다 여러 감정이 차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환갑이 조금 지난, 살짝 나이 든 아저씨일 뿐인데 벌써 이런 병에 걸리다니. 속상한 마음에 건강을 살뜰히 챙기지 않은 아빠의 지난 행동들을 원망했다. 그리고 원망의 뒤편에는 진작에 대장내시경 검진을 챙기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한가득이었다. 당장 며칠 전에도 암 진단으로 법적 처리가 필요한 환자의 사례를 처리하려고 고군분투하며 야근을 했는데, 정작 나의 아빠는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등잔 밑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아빠는 예상치 못한 암 진단에 당황했지만 수술을 받고 다시 일상을 이어나갔다.

녀석아, 아빠 멀쩡해. 환자 취급하지 마.

아빠는 결과를 미리 단정 짓는 걸 경계했다. TV를 보다가 예고편이 나오면 '뭐야 어떡해 주인공이 죽나 봐' 하면서 호들갑 떠는 나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리보기에 진짜 결말은 나오지 않아. 다음 편 보면 알겠지.' 그리고 신기하게도 다음 화를 보면 내가 또 낚였음을 알고 안도했고 아빠는 덤덤하게 다음 화를 기다리곤 했다.



사사로운 일들이 잔물결처럼 밀려와도 그것은 잔물결일 뿐, 모두들 그러하듯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아프지만 당황스럽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괜찮기 위하여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빠의 덤덤함이 나는 더 가슴 아팠다. 그리고 난 덤덤한 아빠 옆에서 같이 덤덤히 있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날 꽤 긴 일기를 쓰다 잠들었다. 눈물을 쏟아낼 곳은 그 공간뿐이었다. 수십 번을 괜찮을 거라고 쓰고 읽고 썼다. 한 바닥 마음을 토해내고 나니, 안개 끼듯 자욱했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최고의 결말은 최선을 다한 뒤 돌아본 발자취가 그려내는 것이다. 시작도 하지 않고 지치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나는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고, 연필을 날카롭게 깎고, 쓰러진 책들을 다시 세워 꽂았다. 더 이상 미리 보기에 낚이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예고편은 오케이, 결말은 아직, 반전은 내 마음대로 적당히. 그렇게 내 취향대로 가보기로 했다.





*치즈 인 더 트랩 중 홍설의 독백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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