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이 왜 모자라

완벽주의 워킹맘의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Regret for wasted time is more wasted time. (낭비한 시간에 대한 후회는 더 큰 시간 낭비다) - Mason Cooley



직장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서로 근황을 나누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결혼 준비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아, 본인도 속상한 마음에 일단 준비를 제쳐두고 냉전 중이라는 것이다.


벌써 연락을 하지 않고 버틴 지 일주일 가량 되었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본인도 절대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결혼식 날짜를 정했기에 이미 준비는 시작했으나 그다음은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이냐 (설마 하며) 물어보니 그게 맞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며 연인이 먼저 연락하여 사과를 하고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면 그때 본인의 계획대로 다시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결혼은 어차피 쌍방의 문제이니 연인이 마음이 급해져서 먼저 연락을 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예상이었다.


나도 예전에 결혼 준비를 하며 신경 쓸 게 많아 업무 중에도 전화를 많이 주고받았던 게 떠올랐다.


결혼 당사자들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으나, 적어도 최소한으로 결정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기에, 결혼식 전날까지 거의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작은 것 하나하나 상의하고 결정하고 또 상의했다.


사실 결혼이라는 일이 제법 큰 일이다 보니 당시에 나의 신경은 예민했고 하루를 해결하면 또 다음 할 일이 기다리니 스트레스가 심각했다. 불확실한 상황 변수가 많기에 마음만 먹으면 다툴거리들 투성이었다. 큰 시험을 치르는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명상과 술상을 번갈아 했었는지.


무사히 예식을 끝나고 허니문을 떠나기 위해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치 거대한 프로젝트를 마치고 포상 휴가를 얻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크게 다투지 않고 여기까지 잘 왔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했다.


중요한 일을 치르다 보면 당사자뿐 아니라 관계자(가족, 지인, 거래처 등등)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의견이 맞지 않아 감정이 상하고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아무리 기쁜 일도 큰 과제로 둔갑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신속하게 해결하거나 제거하여 일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료에게도 조심스럽게 먼저 다시 연락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 불안(어쩌면 당사자는 편안한데 나만 되려 그랬는지도)을 안은 채 아까운 밤을 또 지새우는 게 나로선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게는 절대로 24시간을 넘기지 않아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내가 먼저 연락하거나 대안을 내놓기도 하고, 그렇다 보니 차라리 결론이 빨리 나오니 결과적으로는 잘 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당시에도 이 얘기를 마치 내가 이렇게 해결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어필하듯 떠들었는데 지금 목록을 다시 적다 보니 난 이런 일은 절대 참지 못하니 너희들이 참고하라는 어투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뒤늦은 민망인데 어찌하리오.)


잃어버린 것 다시 찾아놓기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

의식주와 관련된 의사 결정

해당 주(week)의 할 일들에 대한 임시 대책(back up)



목록의 내용들이 내용인 만큼, 대부분 24시간 내에 완벽한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이든 삽이든 들고 나서야 무를 썰든 모래를 파든 일이 굴러갈 테니 주어진 시간을 쉬이 보낼 수 없다. 특히 임시 대책은 잦은 수정을 거듭하는 다이어리가 안쓰러워 마련한 특단의 목록이다.


실제로 플랜 B가 있으면 글씨체부터 고와진다. 나의 경험 상 예상 시나리오를 몇 개 만들고 그에 맞게 움직이면 후회도, 고민도 좀 덜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도 저 목록은 유효하다. 특히 (나와 닮은) 나의 아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하다. 개인적으로 이 원칙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습관이 자리잡지 않아서 대원군의 마음으로 내가 몇 차례 충언을 준 적이 있었다.


1.

작년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는 데 아이가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숙제로 독서 일기를 써야 하는데 공책을 학교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내일까지 반드시 써서 가져가야 하는데 오늘 일기가 빠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난 주방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그 길로 아이와 함께 학교로 갔다. 숙제를 하지 못해 걱정이라면 숙제를 하면 되는 것이다. 교실에서 공책을 찾아들고 나오는 아이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 아이는 분명히 내가 낳은 딸이 틀림없구나. 딱히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유전의 강력한 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이에게 당부했다.


앞으로 준비물을 미리 챙기면 절대 불안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상황을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면 돼. 오늘처럼 이렇게 잘할 수 있어.


아이의 눈빛이 내게 말했다. 미루지 않고 행동하는 용기를 깨달았다고.



2.

또 얼마 전에는 취침 준비로 아이가 혼자 샤워를 하다 이거 왜 이러는 거야 하며 소리를 지른다. 놀라서 들어가 보니, 샤워기가 고장이 났는지 물이 잠기질 않았다. 샤워기 안 쪽 접착 부분이 완전히 떨어져 나와, 사실상 물을 잠그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발을 동동 구르다 남편이 수도관을 잠그고 나서야 집안은 조용해졌다.


밤 10시.

우리 집의 모든 수도는 잠겼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남편은 수리업체를 내일 아침 일찍 부르면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이미 인터넷으로 수리업체를 검색하여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내일 오전 일찍 와주실 수 있나요?"라고 문의하려 했으나, 막상 통화 연결이 되자 "지금 혹시 방문 가능하세요?". 나도 모르게 당장 오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주소를 불렀다.

결국 (나의 급한 심보 덕분에) 자정 무렵이 되어 '샤워기 콸콸 소동'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자칫 날아갈 뻔한 '밤잠'과 '편안한 아침'을 구해냈다는 뿌듯함에 기절하듯 푹 잘 수 있었다.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다.


살아있는 것이 유한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행복도 기한이 있다.

영원하지 않아서 기필코 갖고자 한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다며 할 일을 남겨 둔다. 대부분 시간보다 (하고 싶은) 마음이 부족한 것이다.


하루가 24시간이라 좋다. 나는 딱 적당하다고 느낀다.

그에 맞게 나의 시간을 나름 잘 썰고, 다지고, 맞게 접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루한 시간도 있다. 그 시간에는 감사하게도 기한이 임박한 간단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아빠가 생각나면 가져오라고 하신 그 등산장비가 집안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는 걸. 어제 업무 상 마찰이 있었던 동료에게 반드시 연락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걸. 아이와 약속한 주말 일정을 오늘까지 예약해야 한다는 걸.


나의 가장 애매한 시간들은 나의 내일을 애매하지 않게 만드는 최고의 자원이다.


나의 시간으로 아끼는 이들의 시간을 보태어 줄 수 있다면 아마 난 티끌처럼 모아 깨알 같은 하루를 선물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구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래서 내 시간을 덜어 내주는 대신 그들의 시간이 의미 있게 흘러가도록 내 것인 양 살뜰히 여겨본다.

그들에게 24시간이 모자라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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