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VS 일당백

완벽주의 워킹맘의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오늘도 꽉 찬 일정이 나를 깨운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편이라 뭐 이쯤이야 하며 알람을 끈다. 목록은 이렇다.


새벽 배송 주문하기 - 오늘 21:30

가정통신문 다운로드하여서 이모님과 가족 단톡방에 공유할 것 - 오늘 14:30

아이 실내화 상태 및 사이즈 체크 - 내일 7:00 (출근 전에 확인)

재활용 쓰레기 정리해 놓기 - 오늘 21:00

베개 커버 세탁 - 오늘 21:40

외투 드라이 맡기기 - 내일 9:00

욕실 다 쓴 샴푸통 정리 - 오늘 22:00 (목욕하기 전에 잊지 말자)

읽다 만 책 어떻게든 완독 할 것 - 오늘 22:30




휴대폰이 가진 가장 위대한 기능은 일정관리이고 일정관리이며 앞으로도 일정관리일 것이다. 빼곡히 채워진 일정들이 매일 대기 중이다.



처음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2008년.

그전까지는 휴대폰 외에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많았다.

다이어리와 약간의 문구류, 시계, MP3 플레이어와 이어폰, 그리고 업무용 플래너는 파우치에 항상 한 벌 세트로 갖고 다니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시계, MP3 그리고 특히 플래너의 기능을 같이 수행할 수 있기에, 나는 최고의 안드로이드 폰 수혜자라고 자부한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너는 여전히 갖고 다닌다.)



일정 관리의 경우 나는 구글 캘린더를 주로 사용하는데, 회사에서든 길을 걷는 중이든 할 일이 떠오르면 바로 구글 캘린더에 일정으로 저장한다. 저장된 내용들은 내가 잠든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대변한다. 그래서 내일 할 일이 없어 지루하거나 심심하여 무료할 틈이 없다.



할 일이 많은 날은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이것은 상당한 내공과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출근하며 회의하고, 쇼핑하고, 마트에서 계산하면서도 영어 회화 방송을 듣는다. 시간을 나처럼 쓰는 사람이 있을까 혼자 뿌듯해하며 다이어리에 "Good job"이라고 적으면 훈훈한 마무리.



완벽주의 VS 일당백?


예전부터 남편과 이 주제로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매일매일 많은 과업을 어떻게 감당하고 마무리할지에 대해 우린 서로 다른 방법으로 고민했다.


나는 주어진 시간 동안 많은 일을 끝내는 편이었다. 꽤 오래된 습성이어서 학교 다닐 때부터 목록 세우기를 즐겨했다. 이것부터 저것까지 좌르륵 순서대로 끝내면 그날은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였다


반면, 남편은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선정하고 그것을 마치는 것을 중요시했다. 직장에서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해야 할 때면 유난히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묻고 그 이유에 맞게 일에 정성을 들였다. 나는 낯설지만 매우 다른 그의 방법과 자세를 매우 존중하고 존경해 왔다. 그래서 연애 때부터 결혼 초기까지 난 그에게서 고민을 덜어내고 할 일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마음 법을 배우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점점 지독한 목록 부자가 되어 갔다. 특히 아이를 낳은 뒤, 나의 플래너는 글씨로 빼곡히 채워졌다.


눈 뜨면 사야 할 것들, 해야 할 일들부터 써 내려갔다. 행여나 까먹을까 봐 달력에 표시하고 또 칠판(아이 학습용이라는 명분으로 구입)을 사서 거기에 또 적었다.


거래처에 메일 보내기, 동료 출산 선물 고르기. 그리고 시작되는 육아 목록. 기저귀 사기, 분유 단계 올려서 사기, 구매했던 물건 교환하기, 예방접종 맞히기,....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짧은 휴직을 끝내고 복직한지라 업무 관련 내용부터 자잘한 살림까지 다양하면서도 한결같았다. 어느 날 옷장을 열어 보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날이 추워져 걸쳐 입을 옷을 찾아보니 막상 내가 입을 멀쩡한 외투 한 벌이 없었다. 그렇게 목록은 또 하나 추가되어 한숨보다 더 늘어지고 길어졌다.



날씨가 건조해진 가을. 하늘이 높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날 정도로 화창한 날, 난 아이의 접촉성 피부염을 고칠 방법을 찾느라 인터넷 삼매경이었다. 보습 크림과 가습기가 필요하구나. 하루 종일 아이의 얼굴과 몸을 뜯어보며 우여곡절 끝에 구매를 완료했다. 그러다 문득 비로소 거실 베란다에서 쏟아지는 해 질 녘의 붉은 햇살과 마주쳤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다.

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 뿌듯함이 아니었다.

허무함, 무기력함, 아쉬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여러 가지로 몸이 지쳐서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왜 그렇게 많은 숙제를 주며 어떤 마음의 행복을 기대했냐는 의문이 들었으나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다 이렇게 사는 걸. 혼자 유난 떨지 마.



누구보다 강하고 대단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모든 엄마는 영웅이라는 말에 절반은 동의했다.

영웅은 맞는데, 모든 엄마는 아니다. 역할을 잘 수행하는 엄마 에게만 해당한다. 적어도 나의 생각은 그랬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래도 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라며, 야무진 엄마는 아니어도 최선을 다하는 엄마로서 후회 없이 해보자고 적은 다짐이 어느 다이어리에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다짐은 철저히 잘못되었다. 정확히는, 강하고 대단한 엄마의 정의가 틀렸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이를 재우려 같이 누웠다. 아이에게 있어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 무엇인지 물었다.

어린이집에서 엄마가 같이 카스텔라 케이크를 만들었던 게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고 가장 행복한 추억이라고.

엄마가 바쁘지만 시간을 내서 와주어 감사하다고.


아이의 말에 나는, 긴 시간 스스로 의심해온 엄마로서의 최선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생활은 여전히 수많은 할 일로 가득 차 있고 계속 그럴 것이다. 다만, 엄마로서의 '완벽'은 엄마와 함께 카스텔라에 생크림을 바르는 아이의 미소와 육아를 끝낸 나의 하루를 안아주는 일몰의 시간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그렇게 완벽주의와 일당백에 대한 고민은 몇 번의 수정을 반복하며 될 듯. 안될 듯, 아슬아슬한 파트너 관계를 갱신해 갔다. 나는 직장생활 10년 차의 고비를 넘겨 중견 직장인의 행보를 이어나갔다. 2년 동안 주말과 평일 밤 시간을 활용하여 대학원을 입학하고 졸업했다. 와중에도 퇴근 후 저녁은 영락없는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이와 억(혹은 애증)은 어찌어찌 쌓여갔다.

나의 미션은 그럭저럭 매일 순항 중이고

나의 다이어리는 필체의 큰 변화 없이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완벽주의 X 일당백.....!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왔다.

최고의 조합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방식들이라 취향 껏 버무려본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 갖는 기대이자 기준이고

모든 걸 이루고 싶은 마음은 나의 책임과 도리였다.


스스로 기대에 부응하려고 밤을 새우며 나에게 완벽한 응답을 하고 싶었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들을 품에 안고 그들을 내 하루에 적어갔던 것 같다.


미션을 달성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한 편의 영화 같아서 관객의 자세로 그저 손 놓고 지켜보고 싶기도 하듯,

어느 날은 조금 집요하게,

또 어느 날은 조금 정신없게,

생크림을 바르듯, 저녁 햇살에 마음을 리셋하듯,

나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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