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워킹맘의 취향 사수 에세이
엄마는 어제도 늦게 왔잖아.
아이가 볼멘소리로 말한다.
언제부턴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미운 돼지 엄마. 엄마 너무해. 엄마 미워. 우리 집 유행어다.
나처럼 열심히 사는 돼지가 어디 있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쁜데 이렇게 욕을 먹으니 억울했지만,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올게. 좋아하는 과자 사들고 시간 맞춰서 올게. 아이는 한 번만 봐준다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출근 버스를 무사히 타고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회사 정문은 활짝 열려있다. 마치 환하게 웃으며 반기듯이. 노트북 전원을 누르고 어제 마치지 못한 일부터 이어서 해나간다. 매번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하루를 꼬박 공들인 덕분인지 직장생활 몇 년 차부터는 기한을 놓치는 법이 없다. 오전 11시 40분.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는 애매하고, 혼자 잠시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 사이 또 새로운 알림이 뜬다. 맞다, 점심에 회의가 있었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벌써 2시. 뭔가 오전 내내 열심히 태운 것 같은데 나만 재가 되어 증발하는 기분이다. 문득 진지해진다.
나는 시간에 지배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에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일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정한다.
나는 주로 일을 미리 해버리는 편이다. 굳이 다음에 해도 될 일을 미리 하려고 애쓴다.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기대가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에 할 일을 미리 해버리면 다음 날 다시 그 다, 다음 날의 할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내일 해야 할 일을 오늘 하면 오늘 야근하고 또 내일도 야근한다. 그리고 그 야근은 계속된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일복 많은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한 시절 내내 복에 겨운 나날을 보낸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구나.
언제 하는가에 따라 일의 무게와 온도는 달라진다.
스페인에는 내일 할 일을 오늘 미리 하지 마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오늘이 가진 몫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 일어날 일을 내일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다. 스페인 사람들은 해가 뜨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니 해가 질 때까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가 그렇게 길다 보니 가장 해가 화창한 시간에 낮잠(la siesta)을 잔다. 한창 일할 시간에 잠을 잔다니 내 입장에서는 그곳이 참 흥미롭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중력은 끌어당김이다. 무언가 강하게 끌어당기면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른다. 물리적인 시간뿐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도 비슷하다. 강하게 몰입하면 시간이 사라져 버린다. 그 몰입 안에서 나의 시간은 수많은 일을 이루고 사람을 스쳐간다. 내가 앞만 보며 달린 그 시간 동안에 나의 누군가는 외로움과 부딪히고 혹은 별다른 기억이 없는 시간으로 삭제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끌어당기는 동안 수없이 밀쳐진 것들을 세어보기 시작했다.
가치가 있는 곳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 헬렌 켈러
급하게 수십 장의 문서를 번역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던 날이었다. 번역이 거의 다 끝나서 문서를 새로 저장하는데 갑자기 문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기를 쓰고 하던 일이 막상 무엇인지도 모르다니. 어찌 되었든 임무는 완료했지만 나에게 남은 것은 손가락 건초염뿐이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아니고 그냥 기한 강박증에 걸린 시간 노예. 빨리 달리고 올라가고 또 달리고 일단 가보라는 처세 방정식은 아무리 풀어도 풀리지 않는다. 급하게 빠르게 이룰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기한'보다 빨리 도달한 그곳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무엇이 있기는 한 걸까. 그리고 나는 다시 '왜'라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왜 맨날 늦게까지 일해?
늦게 일하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왜 일하는 가였다. 나는 이 질문이 앞으로 내가 할 수많은 도전과 실패 그리고 다시 도전을 하기 위한 매우 사소한 시작이라고 확신했다. 나의 완벽(을 위)한 하루는 왜 시작되고 또 반복되는가? 마침 그때 아이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엄마 오늘은 일찍 올 거지?
노트북을 끄고 가방을 정리하며 건물을 나서는 순간, 저녁 햇살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부시다. 눈부신 저녁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삭제되지 않을, 삭제되어선 안될 중요한 순간이다. 당당하게 나의 시간으로 걸어가 본다. 어제의 빛보다 더 빠르고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