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사랑을 닮아
주로 노래를 찾아서 듣는 평소와 다르게 타인이 선곡한 한 시대의 노래들을 별 생각 없이 누리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내가 고른 플레이리스트는 리메이크 곡들이다. 리메이크-라고 검색하고 대충 썸네일만 훑어보고 고른 뒤 눈을 감았다. 전주가 흘러나오는 순간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번 역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입니다. 환승하실 승객은 이곳에서 하차하십시오." 그러더니 익숙한 가사와 함께 노래는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방에서 할 일 없이 누워있는데 동생이 불렀다. "누나, 전화받아."
집으로 걸려 온, 날 찾는 전화라 길래 긴장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 누군지 알겠어?"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말투가 왠지 익숙했다.
"나야 나. XX초등학교 XXX."
테이프를 빠르게 되감듯 시간이 순식간에 거꾸로 흘러가더니 하나 둘 장면이 떠올랐다. 동그란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던 녀석의 얼굴과 앳된 목소리가 눈앞에, 귓가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쉬는 시간이면 여자아이들이 모여 공기놀이를 지켜보다가 회심의 꺾기를 할 때 후-하고 바람을 불거나 와-하고 깜짝 놀래 켜 공기 판을 엉망으로 만들던 짓궂은 녀석이 너라고? 이렇게 점잖고 젠틀한 목소리라고? 녀석은 오랜만이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먼저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더니 주말에 모처럼 반모임을 하니 장소를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6시까지 '두타' 근처에서 보자. 기다릴게."
오랜만에 다 같이 보고 싶으니 꼭 시간 내서 나오라고 녀석이 살갑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왕계란이라고 놀려대던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어색했고 (물론 나도 녀석을 주로 '띠용'이라고 불렀다), 잘 지냈는지 근황을 궁금해하는 것도 비현실적이었다. 하긴 뭐, 이런 일도 있는 거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평온했던 하루가 갑자기 지루하게 느껴지고 시간은 또 왜 이리 안 가는지 신기했다.
동대문 '두타'로 가는 길은 꽤 길었다.
지하철로 몇 정거장 안 되는 거리인 데도 열차가 제때 오지 않으면 늦을까 초조했다. 동대문 거리는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걷는 인파로 가득했다. 몸이 갑자기 떨리는 건 날씨 탓이겠지. 떡볶이 코트를 입어도 이리 춥다니 2월 날씨는 정말 이상하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녀석이 알려준 가게 이름을 찾아 들어서니 식당 안쪽 단체석에 쪼르르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자 아는 얼굴들이 일제히 돌아보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중학교 가고 나서 한 번도 못 봤지. 분명 그대로인데 또 어딘가 훌쩍 커버린 얼굴들이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서로 손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어색했다. 사랑스러울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저녁만 먹고 헤어질 수 없어 어디 갈까 두리번거리던 우리는 네온사인 불빛에 홀려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술도 마셔보고 싶었으나 주민등록증의 잉크가 덜 마른 탓에 청소년 입장이 가능한 노래방을 찾아 들어갔다.
"우리 이렇게 다 같이 노래방에 온 것도 처음이야, 진짜 신기하다."
분위기를 띄워보겠다며 먼저 노래방 책을 집어 든 건 '띠용'이었다. 한 때 반장이었던 녀석은 호기롭게 번호를 입력하며 마이크를 집었다. 뭐지, 저 자신감은? 네가 이 노래를 부른다고? 내가 기억하는 녀석의 마지막 노래는 운동회 때 응원가로 불렀던 만화 주제가 '피구왕 통키'였다. 아침 해가 빛나는 끝이 없는 바닷가-를 흥얼거리며 배구공에 다섯 손가락을 갖다 대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 데 네가 어른 노래라니.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녀석이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에 방해작전이 펼치며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를 붙잡고 장난을 걸었다. 녀석은 씨익 웃으며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노래를 시작했다.
"..... 사랑해. 널 잊을 순 없을 거야. 미안해. 널 지키지 못한 것을. " (열창 중)
뭐야, 쟤가 언제부터 노래를 저리 잘했지. 옆에서 낄낄대며 놀리던 우리도 몇 소절 버티지 못하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모두 두 손을 들고 휘적휘적 흔들었고 후렴부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같이 따라 불렀다. 녀석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완창을 했다. 아메리카노도 써서 못 마시는 순둥순둥한 입맛과 다르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는 애절하고 또 애절해서, 우리는 이미 소주 2병은 마신 듯 노래에 얼큰히 취했다. 6년 만에 만난 철부지 남사친이 그토록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게 어색해서 그랬을까. 녀석이 노래를 조금만 더 잘 불렀어도 그윽하게 쳐다볼 뻔했다. 역시 선곡이 중요해.
결국 원곡을 검색해서 듣다 보니 출근 열차가 한강을 건너도 마음은 여전히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 두타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내가 기침 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대놓고 관심법을 구사하는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랑을 이제 막 시작하는 풋내기들이 길에서 흥얼거리던 노래들을 찾아 재생했다.
그 노래들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가사에 영어가 없고, 물론 다른 외국어도 없고, 두루뭉술한 비유도 없고, 찰 진 라임도 없다. 욕이나 은어를 쓰지 않고도 제법 거칠게, 그러나 출렁거리는 감정을 모두 담아, 돌직구로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다. 세련되고 우아한 단어로 고백하기보다는, 눈물을 참으며 "내가 너 좀 사랑했다"며 포장되지 않은 문장들을 가슴에 꽂고 돌아서는, 상남자 상여자 방식인 거다.
이를테면 "떠나가요, 아주 먼 곳으로" (비의 랩소디, 최재훈 )라며 맘에 없는 소리를 하다가, "너를 사랑할 수 없고 너를 미워해야 하는 날 위해"라며 울부짖더니 (발걸음, 애매랄드 캐슬) 끝내 "널 지킬 남자를 몰라" (남자를 몰라, 버즈)하며 삐치고 마는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진 나는 눈을 감은 채, 남자를 몰라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다 느낌이 싸해서 보니 벌써 내리실 곳은 삼성역이라고.
리메이크 곡 덕분에 장기 기억 저장소 맨 끝에 방치했던 기억을 꺼낸다. 꺼낸 김에 먼지를 닦고 천천히 순간들을 더듬는다. 풋내기의 노래는 제법 세련된 스타일로 재탄생했지만 설익은 가사의 향기는 그대로다. 사랑에 아파본 적 없지만 왠지 아픈 것 같이 가슴을 부여잡고 불렀던 그 노래들의 짠내와 탄내, 그을음마저 온전히 남아있다. 녀석이 노래를 부르던 모습도, 친구들과 재회하던 순간도, 아끼는 책 속에 끼워둔 편지처럼 잘 접어 나만 아는 안전한 공간에 넣어둔다.
가끔은 리메이크하고 싶은, 그러나 결코 리메이크될 수 없는 문장들처럼 나도 그 시절에게 고백을 던지고 싶다. 사랑했다고. 영원히 잊을 순 없을 거라고.
현재곡 82628 <천상연> - 이창섭
사랑해 널 잊을 순 없을거야
미안해 널 지키지 못한 것을
너의 행복한 모습 나 보기를 원해
부디 새롭게 시작하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