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건 다름 아닌 추억 때문
서재를 정리한 지 오래였다. 책장 맨 아래 칸을 차지한 두꺼운 책들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딱딱한 표지를 헝겊으로 닦아내자, 커다란 제목이 새 단장한 가게 간판처럼 반짝이며 맵시를 뽐냈다. 일간 신문에 실린 가로세로 퍼즐을 맞추려 꺼내던 ‘국어대사전’, 대학 시절에 사두었던 전공 서적, 표지가 예뻐서 샀던 외국 서적들, 영어를 비롯한 각종 자격시험 대비용 수험서들까지 1층을 묵직하게 지키고 있던 책들을 꺼내 줄지어 세우자, 유구한 독서의 역사 한 토막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벽돌책’을 은근히 아꼈다. 크고 무거운 책을 쌓으며 노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말 오후, TV로 연결된 게임기를 켜고 싶어도 농구대잔치나 프로야구 중계를 보던 어른들은 좀처럼 리모컨을 내주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거실에서 탱탱볼을 주고받다, 한 번은 탱탱볼이 제떨이 위로 튀어 담배꽁초를 몽땅 엎어버렸다. 꾸중이 두려워 방으로 숨어든 우리는, 마땅한 놀잇감을 찾다가 우연히 책으로 무언가를 쌓기 시작했다. 일명 ‘책 쌓기’라 부르는 이 놀이는 탱탱볼을 가지고 놀 때 보다 마음이 편했다. 간혹 누가 덜컥 문을 열고 들어와도 떳떳하게 책을 보여주며 독서를 하려던 참이라는 변명이 제법 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책을 쌓으려던 건 아니었다. 역할 놀이에 쓰려고 책으로 작은 집을 만들었고, 나중엔 누가 더 두꺼운 책 가져오나 내기처럼 번졌다.
처음엔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위인전집, 수수께끼나 짧은 개그를 모아 놓은 만화책을 하나 둘 쌓았다. 그러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책장 꼭대기에 있던 책들 - 이를 테면 삼촌이 즐겨 보던 퇴마록, 고급스러운 양장 표지를 두른, 보기만 해도 군침이 나오는 음식 사진들이 가득하지만 엄마가 좀처럼 읽지 않던 요리책들 – 까지 끄집어내다 보면, 서재는 어느새 책도둑이 다녀간 듯 난장판이 되었다. 하지만 뒷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즐거웠다. 어느 분주한 공사 현장 못지않게 분주하게 우리는 두 팔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온갖 책들을 찾아 바닥에 깔고, 기둥을 쌓았다.
수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며 알게 된 건, 책 쌓기의 핵심은 튼튼한 바닥과 기둥을 위한 ‘벽돌 책’ 찾기라는 사실이었다. 손가락 두께의 얇은 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도저히 펼쳐 볼 엄두가 나지 않는 낡은 옥편, 학기마다 한 권씩 늘어나던 동아대전과, 없는 게 없는 어린이 백과사전을 모두 꺼내고 끝내 국어대사전까지 모이면 묵직한 책들이 탁월한 벽돌 역할을 해줬다. 그 위에 신문이나 잡지를 지붕 삼아 얹으면 제법 그럴듯한 ‘벽돌책집’이 완성됐다. (집을 다 짓고 나니 두꺼운 책을 왜 벽돌책이라 부르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크고 두꺼운 책의 쓸모를 깨달았다. 둔탁하고 지루해 보이는 그들의 외모(?)와 다르게, 그들이 내게 준 건, 바로 재미였다. 벽돌책 놀이에도 장르가 존재했다. 책을 탑처럼 세우기도 하고, 양장 커버를 이용해 독특한 구조물을 만들기도 했다. 책 사이에 작은 물건을 숨겨 보물 찾기를 하기도 했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특정 글자가 많이 나오는 쪽이 이기는 게임도 했다. 벽돌책 놀이는 점차 장르를 확장해 나갔다. 그 세계에서 ‘국어대사전’은 두께나 무게감으로는 적수가 없는 천하장사였고, ‘전화번호부’는 신기한 이름을 찾아내는 예능 같은 존재였다. 책을 미련하게 들어 올리며 힘겨루기를 하다 가도, 마지막에 펼쳐 두고 한참 쳐다보는 책은 단연 ‘전화번호부’였다. 전화번호부를 펼치면 나와 동생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한 이름을 찾아 헤맸다.
“왕 씨도 있네.” “봉 씨도 있어!” “이름이 네 글자인 사람도 있구나!” “우와 김 XX은 전화번호가 엄청 많아.”
이름을 따라 전화번호를 세어보며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확인하던 그 시간들. 책을 덮기 전에 반드시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확인을 했다. 장난전화를 걸고 싶은 유혹을 꾹 참고, 대신 페이지 모서리를 살짝 접어두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책을 쌓지 않는 날이 오자, 벽돌책들은 손이 닿지 않는 서재의 구석, 장롱 위, 창고 깊숙한 곳으로 흩어졌다.
책가방 속이 고등학생 참고서로 빼곡했던 시절, 나는 벽돌책으로 집을 짓던 그 자리에 사방이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 올렸다. 책이란 모름지기 감동이든 깨달음이든 무엇이라도 줘야 펼치게 되는 법인데. 그런 책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야간 자율학습 중 몰래 교문을 빠져나온 나와 친구들은 잠깐의 고민 끝에 노래방으로 향했다.
“대박, 타이밍 조금만 늦었어도 감독 쌤한테 걸릴 뻔했어.”
열심히 뛰느라 시계 방향으로 30도 정도 돌아간 교복 치마를 매만지던 그때,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한 녀석이 테이블 위에 커다란 책을 펼쳤다. 바로 노래방 책이었다.
액자만큼 크고 묵직한 이 책은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 곡 번호가 수백 개, 아니 수천 개 빼곡히 들어 있었고, 비닐로 한 장씩 덮여 있어 넘길 때마다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특히 많이 넘긴 장들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그곳에 적힌 노래들은 누군가의 단골 애창곡일 거란 생각에 괜히 천천히 조심스럽게 더듬어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다. 빠르게 훑어보는 속독, 중요한 부분만 고르는 발췌독, 꼼꼼하게 읽는 정독. 노래방에서 책을 펼치면 이 모든 방식을 조합한, 특별한 독서법이 필요하다. 노래방은 대개 시간을 정해 요금을 지불하므로, 연습실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연스레 시간에 쫓기게 된다. 그렇다 보니, 시간 내에 원하는 노래를 모두 부르도록 노래 제목을 예약하고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노래방 책은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 위한, ‘전략적 독서’를 위한 무기다. 일행 중 노래방 고수 - 노래방에서 쌓은 내공과 압도적인 암기력을 자랑하는 사람 – 가 있다면 일단 안심이다. 아마도 그들은 빠르게 선곡을 유도하며 말할 것이다.
“자자, 이제 신속하게 예약 들어가야 해. 서두르자.”
어쩌다 한 번 노래방에 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입장과 동시에 어떤 노래도 떠오르지 않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 사람도 막상 노래방에 들어서면 뭘 불러야 할지 잊곤 하니까. 노래방 책을 허겁지겁 넘기며 기억을 더듬다 보면 결국 울상이 될 테지만, 노래방 고수는 그런 당신에게 웃으며 말할 것이다.
“괜찮아. 천천히 예약해도 돼.”
이미 애창곡 번호를 최소 서너 개 이상 외우고 있는 그들은 차분히 노래를 예약할 것이다. 그리고는 너무 빠르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며 당신에게 조용한 독서의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그 틈을 타 진짜 ‘전략적 독서’를 해보자. 기억을 더듬으며 페이지마다 숨은 ‘나의 노래’를 찾아가 보자. 책 속에 촘촘하게 걸린 음표 같은 제목들을 천천히 더듬다 보면 내가 불러야 할 그 곡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전투적으로 독서를 시작하다 보면 지금까지 만났던 벽돌책을 읽는 것과 다른 독특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노래방 책의 진짜 매력은 츤데레 같은 친절함이다. 노래방이 낯선 이들을 위해 ‘인기곡’을 엄선해 묶어 두거나, 망설임 없이 유행에 목소리를 맡기도록 최신가요 코너를 앞에 배치해 놓은 것도 그 덕이다. 노래를 잘 몰라도 인기 곡에 아는 노래 하나쯤은 있고, 혹시 버벅거리더라도 누군가 알아서 마이크를 넘겨받아 불러줄 테니 걱정 없다.
요즘은 최신식 기계 덕분에 검색도 쉬워졌지만, 나는 여전히 낡은 노래방 책을 끌어안는 시간이 좋다. 놀이를 하다 미처 찾지 못한, 책 속에 숨겨둔 보물을 다시 만나는 기분을 만끽하며 세상에서 제일 신나고 엉뚱한 독서를 즐긴다. 그러다 보면 벽 속에 꽁꽁 숨겨둔 나와 화해를 하게 되고, 우직하게 책을 쌓아 올리던 어린 날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두꺼운 책을 펼치며 나는 미소를 짓고 또 가끔 눈물을 글썽인다. 어린 내가 그토록 찾던 단단한 벽돌책을 찾았다고, 크게 외치고 싶은 마음을 다시 또 책 속에 끼우며.
현재곡 9315 <비밀의 화원>-이상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새들은 걱정 없이
아름다운 태양 속으로
음표가 되어 나네
향기 나는 연필로 쓴 일기처럼
숨겨두었던 마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어
비가 와도 젖지 않아
이미지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