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r 는 ㄱ r 끔 눈물을 흘린 ㄷ r
한 때 ‘K-장녀’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인터넷에는 장녀들의 전형을 우스꽝스럽게 정리한 글들이 떠돌았다.
'집에 가면 밖에서 있었던 일 얘기 잘 안 함. 밖에서 싹싹하게 집에선 무덤덤하게. 장녀들은 다 현관문 옆방 씀. 말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정작 자기는 혼자 참고 혼자 삭힘.(이하 생략)'
그 글들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는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나도 조금은 그 틀 안에 들어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웃고 난 뒤엔 어김없이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렸다. 막내가 아니어서, 아들이 아니어서, 보이지 않는 기대와 침묵의 의무를 먼저 배워야 했던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부담감, 아들이 아니기에 허락되지 않은 특권을 포기하며 감당했을 상실감, 여자아이에게 주어지는 역할에 대한 버거움은, 사회로부터 장녀만 느끼는 특별한 중력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장녀들이 모두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어떤 전형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건 사실이니까.
내가 자란 90년대는 첫째 딸을 낳고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이를 더 낳던 시대였다. ‘딸을 낳으면 죄인이다’, ‘아들 없으면 다 소용없다’ 같은 섬뜩한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갔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당연한 듯 통용되었다. 딸은 언젠간 집을 나갈 사람이니 아들보다 덜 귀하다는 논리, 집안의 기둥은 오직 남자여야 한다는 전통은 말없이도 세상의 공기를 구성했다.
그런 논리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거대한 남녀의 벽을 실감할 때마다 딸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여자로 태어난 걸 후회하면 겨우 한 줌 움켜쥔 자존심도 가루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내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대신, 오빠가 있는 여자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적어도 태어나자마자, ‘아들 없으면 다 소용없다’는 말을 듣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첫 아이를 안고 기뻐해야 할 그 순간, 부모님은 웃지 못했다는 걸. Y염색체 하나 없다는 이유로, 대를 잊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는 시작부터 환영받지 못한 딸이었다는 걸. 나는 기쁨의 데뷔작이자, 실패작이었다. 아들 없는 집이라는 멸시를 피한 건,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였다. 아빠는 거하게 취할 때마다 그때를 회상했다.
“우리 딸 태어난 날 왜 그렇게 서운했는가 몰라. 이렇게 귀한 딸인데!”
장녀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자라면서 더 또렷해졌다. 여자아이라면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첫째는 책임감 있어야 한다는 조언이 늘 함께였다. 주로 엄마 또래의 어른들 (혹은 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 입에서 나왔다. 그들은 내 손을 잡으며 최대한 빨리 취업해서 살림에 도움이 되거나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는 인내와 희생의 여성으로 잘 자라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그 말들에 선을 그을 줄 알았다.
엄마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내 귀를 막아주듯 ‘테스’, ‘여자의 일생’과 같은 소설책을 읽어주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좋아했던 아빠는 여성이었던 그들이 절벽으로 뛰어든 건 낙하가 아니라 비상이라고 했다. 아들과 딸을 차별 없이 대했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K-장녀’라는 이름을 콤플렉스가 아닌 이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연히 양보해야 하는 아이가 아닌, 더 고민하고 선택하는 아이. 처음이라 서툴고 엉성하게 키운 자식이 아닌, 처음으로 공들인 자식. 아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딸이 아닌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딸. 내가 저항하고 버티는 만큼 세상도 변하고 있다고 믿었다.
90년대 말, 교과서에서 ‘평등’이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만났다. 글짓기 대회나 토론 대회에서 ‘남녀평등’은 ‘남북통일’만큼이나 자주 다루는 단골 주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큼 ‘평등’이 간절했던 시대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평등’을 부르짖으며 연설문을 쓰다 가도, 교복 블라우스를 치마 밖으로 내 입고 다니다 선생님의 눈에 띄면 ‘너 그러다 좋은 곳으로 시집 못 간다’-는 꾸중을 들었으니 말이다. 곱씹어 생각해 보면 쉽게 삼키기 어려운 가시 돋은 말이지만 그 마저도 무덤덤하게 흘러 들을 만큼 세상에 따지고 싶은 부채감이나 억울함을 쌓아두지 않았던 터라, 장녀-답지 못한 나에게 학교 생활은 대부분 즐거웠다. 그런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당당한 신여성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용기 있는 항거 용사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나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순수한 기백으로 인정해 준 애들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H도 그런 시기에 친구가 되었다. 그 역시 남동생을 둔 장녀였고 체육교사를 꿈꾸던 아이였다. 반대표로 계주를 나가 달릴 만큼 운동을 잘했고, 공부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그는 언젠가 말했었다.
“아빠가 딸까지 대학 보내기엔 우리 집 사정이 빠듯하대.”
그에게 대학에 간다는 건, 스스로 입시를 준비하고 입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는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집에 알리지 않은 채 몰래 시작한, 그가 스스로 결정한 첫 번째 일이었다.
때때로 그가 일하는 매장에 예고 없이 찾아가면, 깜짝 놀라며 웃는 얼굴로 반겼다. 조금만 기다리라며, 바쁜 일을 끝내고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트레이에 담아 나왔다.
“제일 인기 많은 메뉴로 내가 알아서 골랐어. 네가 주문하면 난 그렇게 걱정이 된다.”
H는 햄버거 좀 먹어 본 선배 같은 노련함을 뽐내며 음식들을 먹기 좋게 포장을 벗겨 각자 앞에 하나씩 두더니, 내게 가성비 넘치게 주문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음료는 둘이 왔어도 하나 시켜서 리필해서 마시고, 이 버거는 재료가 부실하니 시키지 말고, 대신 여기는 감자튀김을 잘하니 걱정 말고 먹으라고. 그가 알려준 그대로 감자튀김에 케첩을 듬뿍 발라 입에 넣었다. 눈을 감고 입 안에 퍼지는 느끼한 향을 즐기다 눈을 뜨니, 머뭇거리다 입을 떼는 H가 보였다.
“나, 대학 안 가려고. “
한 학기만에 그의 꿈은 바뀌어 있었다. 생계를 책임지는 장녀, 가정에 보탬이 되는 딸. 누군가가 정해둔 장녀의 역할 안에서, H는 자신의 삶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고, 대신 빨리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싶다며,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는 법을 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짜 네가 원하는 선택이냐고,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이 그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아 꾹 삼켰다. 포기라는 말 대신 ‘선택’이라 부르기로 한, 그 고백의 무게가 손끝까지 전해졌다. 어쩔 수 없이 미래를 양보한 거라 결론짓고 싶지 않으려는 힘겨운 저항을 느꼈다. 그 안에는 꿈을 내려놓는 대신 스스로에게 내리는 마지막 위로가 숨어 있었다. 우린 햄버거 속에 많은 말들을 꾹꾹 눌어 담아 애써 웃었다.
시간이 흘러 스무 살 봄.
대학 캠퍼스를 구경하고 싶다는 말에 나는 그를 학교로 불렀다. 학교 안팎을 구석구석 함께 걷다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H는 능숙하게 왕갈비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알바를 꾸준히 한 덕분에 스무 살에 매장 수퍼바이저가 되었다며, 갈비는 무조건 자기가 사겠다며 연실 강조했다. 언젠가는 자기 매장도 차리고 집에서 나와 독립할 거라는 포부도 전했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근데 나 가끔 노래방에서 운다. 펑펑."
순간, 그가 고른 모든 곡이 슬픈 노래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수들도 무대에서 울어."
나는 황급히 기억을 떠올려 무대에서 눈물을 흘린 가수들을 나열했다. 노래가 슬퍼서 흘리는 눈물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겠냐고, 그의 눈물이 한 방울도 터무니없지 않다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 말이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비록 노래를 틀어 놓은 채 부르지 못하고 울고 있었던 것일지라도, 노래가 슬퍼서 운 게 아니었을지라도, 그 눈물의 품격을 지켜주고 싶었다.
눈치가 빠른 그는, 오늘의 산책은 가슴이 뻥 뚫릴 만큼 행복했다고, 되려 나를 위로했고 나는 그를 대신해 펑펑 울었다. 그날 난 녀석을 위한답시고 건배를 남용하다 잔뜩 취해버렸고 H가 내 짐을 챙겨서 데려다준 것만 겨우 기억했다. 지독한 숙취에 겨우 눈을 뜨니 H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너 일기장 두고 갔다. ㅋㅋㅋ’
내 비밀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협박까지 놓치지 않은 게 과연 녀석 다웠다. 도서관 앞에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기다린 녀석은 캔커피와 일기장을 주고 사라졌다. 열람실에 앉아 일기를 쓰려고 펼치니 낯선 필체가 있었다.
‘나야. 네 허락 없이 써서 미안해. 오늘만 네 공간 좀 빌릴 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결국 일기를 조금 읽어보았다는 고백과 함께 시작하는 H의 편지였다. 네 장 짜리 편지에는 영원히 중학생 같을 줄 알았던 우리가 벌써 어른이 되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내가 잘 지내고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대학에 가서도 고민이 많은 나를 얼마나 응원하는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편지의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순식간에 시선을 뺏은 어떤 문장에 내 심장은 요동을 쳤다. 거기엔 삼 년 전 대학에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그날에 관해 적혀 있었다. 사실은 대학에 너무 가고 싶었다고, 그게 몹시도 억울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많이 울었다고. 늦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 시작해보고 싶다고. 그러면서 굵은 글씨로 내가 즐겨 듣던 노래 가사를 적어 둔 것도 M이 나를 응원해 온 방식 그대로였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거.’
읽는 내내 눈물이 흘러나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 펑펑 울었다. 용기 내어 속마음을 적는 순간에도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았을 H의 얼굴이 떠올라서, 한 때 혼자 노래방에서 반주만 흘러 내보낸 채 목놓아 울었을 H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캠퍼스에서 지난날 접어 둔 꿈을 더듬으며 멈칫했을 H의 느린 걸음이 떠올라서. 그런 순간에도 괜찮아야 했던 H의 시간들이 떠올라서. 일기장에 가득 쏟은 눈물은 금세 마르고 꿈은 또 빛바랜 페이지에서 잠들어버렸지만 그날 봄은 그를 위해 함께 울었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일기장 속 H를 떠올릴 때면 조용히 노래를 튼다. 여전히 괜찮은 척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그가 잠시나마 마음 놓고 울 수 있기를 바라며.
현재곡 7266 <달리기> - S.E.S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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