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우리에게 닿기를
어쩐지 누워만 있고 싶은 날이었다.
눈을 감지 않고 일어나기까지 10분, 침대를 벗어나기까지 또 10분. 꾸물대는 사이, 햇살의 각도가 달라졌다. 창밖의 해는 어느새 중천. 창문을 여니 정수리를 뜨겁게 때리는 햇살이 마치 엄마 얼굴 같았다. '그만 일어나'라고 말하는 듯.
그래, 일단 나가보자.
다행히 지독한 중력은 침대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졌다. 오히려 어디론가 튕겨나갈 것처럼 발걸음이 빨라졌다. 낯선 곳은 여전히 무섭지만 여행이 고플 때면 무작정 길을 나선다. 익숙한 길에서 시작해, 익숙하지 않은 풍경 앞에서 멈춘다. 아무 골목이나, 괜히 기웃거려 본다.
집과 집 사이에 작은 집이 들어서고 또 집을 허물어 새로 집 짓기를 반복한 이 도시에는 모세혈관 마냥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골목이 깊숙이 뻗어 있다. 골목은 집과 집을 나누는 경계이자 수없이 덧칠된 역사의 윤곽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서울, 사등분을 하면 1 사분면에 해당하는 동북 지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골목 여행 코스다.
나는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길을 좋아했다. 성북천으로 이어진 동네를 오가거나, 경동시장에서 홍릉으로 이어진 주택가를 특히 좋아했다. 골목 사이로 여름이 흘렀고, 그 시절의 내가 아직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모델처럼 훤칠하게 쭉 뻗은 테헤란로와 다르게 나를 위한 골목 코스는 실핏줄 마냥 듬성듬성, 어쩌다 뻗은 길이지만 그래서 더 나 같았다. 네이버 지도를 한참 확대해야만 보일만큼 이름 없는 아무 길이다 보니 그날의 날씨나 걷는 내 기분에 따라 ‘바람이 솔솔 부는 골목 코스’였다가 ‘매번 오르막에 속는 골목 코스’가 되기도 했다.
그날의 코스도 마땅한 주제 없이 시작했다.
일단 나를 감시하는 햇빛으로부터 조금 편안해지려고 뒤통수가 뜨거운 방향으로 걸었다. 저절로 예전 등교길에 가까워졌고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연락한 지도 오래고,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지내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날은 조용히 그 애가 살던 동네로 가보고 싶어졌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발이 뒤따랐다. 갈 계획도 이유도 없었지만, 자꾸만 그 애가 이어폰을 내밀며 “이 노래 들어봤어?” 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골목 어귀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잊고 지내는 사이 그 동네는 참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재개발이 된 모양이었다. 예전에 자주 갔던 분식집도, 포스터 덕지덕지 붙어있던 문방구도, 동네 뒷산으로 향하던 오르막 골목도 모두 사라지고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어딘가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정말 운 좋게도 예전 골목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낡고, 조용하고, 조금은 지친 듯한 풍경.
그곳을 걷자 오래된 오후의 빛깔이 다시 피어났다. 방과 후, 그 애와 나란히 걷던 길. 노란 햇살이 옷소매 끝에 내려앉고, 어느 집 굴뚝에선 된장찌개 냄새가 피어올랐고, 편의점 스피커에선 트로트가 흐릿하게 번져 나오던 시간과 그 애가 이어폰 한쪽을 건네며 들려주던 노래까지.
주머니 깊숙이 숨겨둔 카라멜을 꺼내듯 몰래 내어 준 노래들이 시작되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 사이에 가장 조용한 대화였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멜로디가 지금도 내 마음 어딘가에 작은 반주처럼 남아 있다.
친구네 집을 찾으러 이 골목으로 갔다가 되돌아 나와 저 골목으로 왔다 갔다 하며 한참 헤매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우린 헤맨 만큼 서로의 집을 기억했다. 술 취한 아저씨가 몸을 가누지 못하며 무릎으로 두드리던 대문을, 장마가 지나면 녹슨 칠이 손톱만큼 시커멓게 벗겨지던 우편함을, 평상에 모여 앉아 시래기를 말리던 여인들의 대화소리를, 꾸지람을 듣고 쫓겨 나와 문 앞에 서서 내내 흘러내리던 눈물을, 그 모든 냄새와 소리와 얼굴을 품은 골목을 기억했다. 그렇게 그날, 나는 사라진 것들 사이에서 겨우 하나 남은 골목과 오래된 노래 한 곡으로 그 애와 함께 걷던 시간 전체를 다시 만났다.
무거운 마음을 달래듯, 골목을 걸으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낯선 골목의 담벼락, 방충망 너머 들려오는 TV 소리. 벗겨진 우편함, 지나가는 바람. 세상이 나를 들어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 손뼉 쳐주진 않아도, 어디선가 흐릿한 반주가 깔리고, 그 위에 내 목소리가 얹히는 듯한 기분. 세상이 다정한 노래방이 되어준다. 그날의 나는, 그렇게 조용히 회복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고 과자 한 봉지를 옆에 두고 책을 읽는 걸 매우 좋아하지만, 어쩐지 안락한 손길에서 벗어나 거칠고 뿌연 거리로 나서고 싶은 건 왜일까. 꼬불꼬불한 골목 끝에서 비로소 닿을 그 시절이 그리워서인지도. 달라진 목소리로 용기 내어 노래를 불러본다. 어쩌면 신의 장난으로 이 노래가 그 시절의 나에게 닿길 바라며.
어쩌면 내가 그날 골목에 나선 건 세상이 나에게 먼저 다정해지길 바랐던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먼저 다정해지고 싶어서였을지도. 그리고 그날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아직도 내 안에서 천천히, 작게, 계속 울리고 있다.
추신: 혹시 모를 신의 장난을 위해, 그 시절에게 보내는 노래를 덧붙인다.
현재곡 74941 <너에게 닿기를> - 10cm
천진난만한 이런 기분도
신이 나서 날아갈 정도로 웃었던 날도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키울 수 있도록
이미지 출처 :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