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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pr 20. 2023

4/19  세상의 끝에서 "뭐 어때ㅑ옹"을 외치다

필사적인 필사일기 - <젊은 ADHD의 슬픔>

노력했는데, 술 끊으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내 노력보다는 ADHD 기질이 강한 것 같았다.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직전에 내 인생은 노력의 분야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ADHD에 항복하고, 질환의 파편으로 존재하는 모든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ADHD와 나는 원심분리기에 돌려도 분리되지 않으니 차라리 공존을 택한 것이다.

원래 나의 좌우명은 '불광불급' 혹은 '너에게서 나온 건 너에게로 돌아간다'였다.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미쳤다'라는 말에 기피증이 생겨 '불광불급'을 탈락시켰다.

'너에게서 나온 건 너에게로 돌아간다.'

이 구절은 착하게 살자는 의미였지만 ADHD를 대입하면 지독한 뜻이 되므로 역시 지워버렸다. 지금 내 좌우명은 '뭐 어때 ㅑ옹'이다. '뭐가 어때요'가 아니고 오타 그대로 '뭐 어때ㅑ옹' 별 뜻 없지만 그 어떤 규칙성도 찾아볼 수 없는 배열이 내 인생을 닮은 것 같다. 지금도 심각한 열등감이나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저 말을 떠올린다.


    ADHD라도 뭐 어때ㅑ옹

    또 지각했어도 뭐 어때ㅑ옹

    맨날 돈이 없어도 뭐 어때ㅑ옹

    끝맺을 말이 마땅치 않아도 뭐 어때ㅑ옹


<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저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 나도 예외일 수 없다. 나의 경우, 주로 여유 있고 관조적인 캐릭터를 선택한다. 여유가 없고 다급해질 때마다 불 같이 타오르는 괴팍한 성격을 감추려면 정반대로 생긴 가면이 제일 좋다. 가면만 잘 쓰고 있으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상황이든, 회사생활을 잘한다는 평판을 얻는다. 직장 생활 5년 차 열혈 대리였던 당시 나는, 가면을 꽤 잘 다루었다. 침착함을 잃지 않고 주어진 일을 잘 마무리했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애사심 충만한 멘트까지 장착한 처세꾼이었다.

완벽한 K대리의 가면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가면이 완전히 녹아 버린다는 점이었다. 유독 일에 대해서는 약간의 강박과 지독한 완벽주의 성향을 가졌었는데,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눈이 돌아가고 코가 뒤집혔다. 소위 '가면 벗겨짐'이라 부르는 이 증상은 내가 경험한 부작용 중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날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관청의 사무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필요한 서류를 모두 출력, 인덱스 라벨까지 다 붙였고, 요약정리한 자료까지 넣어서 회사 로고가 찍힌 봉투에 담아 서울역 KTX에 올라탔다. 충북 오송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러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아침에 확인한 기상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빗물은 사정없이 튀어댔다. 옷은 다 젖어도 되지만 서류만은 안된다고 봉투를 힘껏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택시를 탔다. 서류 봉투는 이미 너덜너덜 거지꼴이었고 요약정리한 내용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심하게 번지고 말았다. 아, 진짜 미치겠네.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뒷좌석에 앉았다 섰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택시 천장을 바라보며 나오는 말을 마구 쏟아냈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내 얼굴로 내 표정으로 내 목소리로 절규하며 미친 광대처럼 흐느꼈다.

순간 드는 생각. 아 가면이 벗겨졌네. 빨리 다시 써야지. 나는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백미러로 나를 쳐다보는 택시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에어컨 틀었슈."

나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어색한 정적은 더더욱 참지 못하기에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예보에 없던 비가 왜 이리 오는지 모르겠어요. "

기사님은 꿈쩍도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냅둬유. 지도 올만하니께 오나 보쥬. 지가 오겠다는데 워쩌겠슈."

그러더니 내게 휴지를 건넸다. "그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그런거쥬. 기냥 냅둬유."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상하게도 더 이상 투덜거릴 수 없었다. 비가 오는 걸 내가 뭐 어쩔 거야. 나는 젖은 몸을 대충 털고 관청으로 걸어갔다. 잔뜩 번져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지만 늘어진 시래기 말리듯 펼쳐 놓고 내가 아는 지식과 언어로 사무관에게 설명했다. 결과는 어땠냐고? 뭐, 보기 좋게 망쳤다. 그러나 어쩌겠나. 그럴 만하니 그랬겠지.

'일잘러'처럼 굴다 가도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하늘을 본다. 비가 거세게 내려도 워쩌겠나. 기냥 냅둬야지. 그럴 때마다 나는 어설픈 가면을 빗속으로 던지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가면 벗기 딱 좋은 날씨다. 얼룩진 서류를 당당히 들고. 세수하고 나온 얼굴처럼 눈을 크게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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