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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07. 2021

세상의 절반,  이스파한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서양 미술 이야기'











중세 미술 (476~1400) AB


1. 이슬람 건축 미술





사파비 왕조는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사산왕조가 

이슬람 세력에 무너진 후 새롭게 재건된 왕조다.

사산왕조 때 왕조들은 

페르시아 전역을 통일한 왕조가 없었으나

사파비 왕조에 들어 

다시 페르시아는 하나의 국가가 됐고

중세 이란의 가장 강대한 왕조였다.




이란인들의 시에 대한 사랑은 못 말린다.

이슬람 문학의 대표적인 시인들은

대부분 페르시아 출신이었다.

페르시아어의 운율은 매우 음악적이어서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들린다 한다.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인들도

어릴 때부터 시 교육에 잘 받고 자라서

시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프랑스어는 운율이 아니라

발음 자체가 아름답다.




이스파한은 사파비 왕조의 수도였다.








세상의 절반을 줘도 바꾸지 않을 

이스파한


33개 아치의 시오세 폴 다리, 이스파한






이란의 문화 수도 이스파한의 수식어로

그들의 문학적 취향과 썩 어울리는 말이다.

줄여서 '세상의 절반'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을 가져다줘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매우 시적인 표현이다.



이스파한은 2006년

이슬람 전체 국가의 문화수도로 지정됐다.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이란이지만

이스파한에는 고대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는 도시다.

서아시아의 중요한 길목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오고 가는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교차로 역할을 했던 도시답게

이스파한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세상의 절반' 다운 도시다.



이스파한의 심장부로 진입하다 보면 

짙은 가로수길과 곳곳의 고색창연한 모스크,

고요하게 흐르는 자얀데강의 풍광에 

차분하게 젖어든다. 

테헤란의 매연과 혼잡함을 벗어나 

이스파한에 닿으면 숨통이 트인다. 

도시는 다소 퇴락한 느낌이 들지만 

자연스럽게 역사 문화 도시라는 

정체성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스파한은 지난 2017년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체결한 도시다.

실크로드를 사이에 두고 의미 있는 일이다.









세계 최초의 가로수 길

차하르바그








이스파한의 중심 도로는

도시를 가로지르며 길고 곧게 뻗어 있다. 

길가에는 무성한 잎을 드리운 

가로수가 도열해 있다.

이 길이 바로 세계 최초의 가로수 길인 

'차하르바그'라고들 한다. 




사파비 왕조가 이스파한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조성한 이 길은 

당시 우마차가 다니는 길을 터놓는 대만 

집중했던 모든 국가들과는 달리 

과실수와 정원수들이 심어져

도시를 한결 풍성하게 만들어져 있다. 

당대의 유럽 도심 도로들이 

오물에 뒤덮이고 삭막했던 것에 비한다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처음 조성할 때보다 훨씬 초라해지고 

삭막해졌다고 하지만 

현재의 모습도 세계 어느 도로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곧고 아름답다. 

높은 가로수 아래 벤치를 설치해 

시민들이 길을 걷다가 

언제라도 앉아서 쉴 수 있다.



자연과 더불은 삶은

안식과 풍요와 서정과 낭만과

위안과 아름다움과 건강을 준다.






차하르바그가 만들어진 경위는 이러할 것이다.

차하르바그는 조경을 분할하는 조경 언어이다.

가로수 길을 만들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도시 전체를 조경으로 보고 

조경을 분할하는 마차 길과

그 옆에 사람 다니는 길을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나중에 가로수로 적당한 나무를

따로 생각해서 심게 된다.




조경 속에 길이 있고 수로가 있고

하수도가 있고 집도 있고 그런 것이

제대로 된 개념인 것이다.











세상의 원형

낙쉐자한 광장(이맘 광장)









(정면) 샤 모스크, (왼쪽)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 (오른쪽) 왕궁 알리카푸







천국을 지상에 구현하고자 한 광장



이스파한의 대표적인 명소는

낙쉐자한 광장이다.

길이 512m, 너비 163m 크기의 직사각형인

이 광장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이다.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1세는

이스파한을 왕조의 수도로 정한 뒤

매우 정성을 들여 이 광장을 만들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을

천국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낙쉐자한이라는 말은

‘세상의 원형’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의 모습,

본래의 그 모습이라는 말이다.

압바스 1세는 이 정원을 만들어 놓고 

에덴동산의 모습이 이 모습이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사 완성을 얼마 남겨 놓기

전에 최후를 맞이한다.


압바스 1세는 이 정원의 사방에 

중요한 건축물 하나씩을 배치했다. 

북쪽은 백성들의 삶의 현장인 바자르,

남쪽은 이란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샤 모스크를 지었다. 

동쪽에는 왕과 왕의 여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여성 전용 모스크인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가 있고 

서쪽에는 압바스 1세의 거처인 

왕궁 알리카푸를 세웠다.




낙쉐자한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분수를 품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넓은 잔디공원이 만들어졌다. 

4개의 건축물이 이 광장을 호위하듯이 

잔디공원도 연못을 가운데로 두고 

정확하게 4등분 돼 있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인 대칭 구조이다.


사파비 왕조 시절에 백성들은 

이 공원을 중심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장을 펴거나 거대한 종교행사를 열었다. 

이야기꾼들은 광장에 모인 백성들에게 

페르시아의 신화나 고대 왕들이 

로마 제국을 꺾은 영웅담을 들려줬다. 

왕들은 알리카푸 궁전의 발코니에서 

외국 사신들과 함께 광장에서 펼쳐지는 

폴로 경기를 관람했다고 전한다. 


페르시아의 문화와 종교, 역사, 

심지어 페르시아인들의 삶의 흔적,

그 모든 요소들이 압축된 곳이 바로 

이스파한의 낙쉐자한 광장이다.




낙쉐자한 광장의 모든 건축물과 정원이 

대칭으로 이뤄진 것에 반해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와 샤모스크는

약 45도 정도 방향이 틀어져 있다. 

완벽한 조화로움에서 삐져나온 부조화는 

카바 신전을 향하는 방향성을 일컫는 말인

'끼블라'로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호텔 방 천장에 화살표가 붙어 있다.

그것도 바로 끼블라다. 

무슬림들은 기도시간이 되면 

끼블라를 향해 카펫을 편다.


낙쉐자한 광장을 설계한 건축가는 

사파비 왕조의 궁정 건축가였던 

아크바르 에스파하니였다. 

그는 낙쉐자한 광장을 만들면서 

끼블라에 방향을 맞춰 지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남북 정방향에 맞게 정원을 설계하고 

두 개의 모스크 방향만 살짝 뒤틀었다. 

그는 현명했던 것이다.


















낙쉐자한 광장 북쪽에 

이스파한의 그랜드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는

둥근 천정을 가진 아케이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시장 골목길에 지붕이 있는 것이다.

기후나 지역 상으로 보아 비를 피하려는 것은 아니고

햇빛과 모래 바람을 차단한 거대한 실내 상가이고

유럽 많은 나라들의 재래시장의 모체이다.


페르시아는 태생적으로 무역 강국이다.

실크로드의 모든 길은

페르시아의 바자르로 통하고 있었다.

그 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포용 정책도 썼다.

무역의 천재들인 아르메니아인들을

그랜드 바자르 근처로 15만을 이주시켜

특혜를 준다.

아르메니아인들 덕에 카펫 무역이 활성화되자

보석 무역도 맡아하게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세계적 네트워크는

후에 영국이 인도와 무역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페르시안 카펫








이스파한보다 멋진

카샨의 바자르



카샨은 테헤란으로 향하는 

이란 이스파한 주의 북쪽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이스파한에서 멀지 않다.


아주 작은 소도시인데도

의아하게도 바자르가

시장인지 사원인지 궁전인지 모를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는 데는 내막이 있다.


카샨이라는 지명은 ‘타일’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

그만큼 세계 타일 발생지로 유명한 곳이다.

컬러 타일을 만들려면 안료가 필요하다.

카샨이 타일의 도시가 된 사유는

코발트블루 안료 주산지였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무역에 페르시아 주요 수출 품목에는

카펫과 보석과 등과 더불어

코발트블루 안료도 있었다.

카샨의 코발트 원석을 잘게 빻아 물에 갠 안료가

14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해졌고

청화백자를 탄생시켰다.




카샨의 바자르 인테리어는

천정 중앙에 끝 꽃잎이 유연하게 휘어져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듯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메인 꽃의 사선 형태는

가운데서 밖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적절하고

컬러는 푸른색 타일로 강조되어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설계도 설계이지만,

공사가 설계 변경 없이

설계자 의도대로 실행이 가능했다는 사실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영감을 주는 건축 디자인

쿰의 히스토리컬 바자르









카샨에서 테헤란을 향해 더 가다 보면

중간쯤에 '쿰'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그곳 바자르는 또 다르게 인상적이다. 


메인홀에 둥근 우물 천정들이 보이는데

컬러는 베이지를 주조로 해서

흰색을 강조로 사용했고

돔과 천정을 잇는 에지 부분을

라운드로 둥굴린 것이 눈에 띈다.

그것만으로도 설계자가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 건축가들은 설계 시 빛을 가장 고려하고

시공 시 방수가 신경이 제일 쓰인다.

페르시아는 건조한 지역이니

방수 걱정할 일이 아니고

빛은 천장을 통해 한번에 해결했다.

실내 곳곳 구석까지 밝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쯤 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세계 건축하는 사람들이나 프랑스인들이 

그렇게도

세계 현대 모던 건축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건축가들이 애들 장난으로 보인다.


내 생각이 엉뚱한가?

프랑스 학교에서 몇 년간 배운 것보다

이 현장 하나가 주는 충격이

그러하다는 얘기이다.




현대 건축의 문제점은

세부 인테리어는 건축 후

입주자의 몫으로 돌린다.

모든 사람이 의견이 틀리니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건축 학교 수업부터 나눠져 있어

자기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테리어 업자가 

건축을 건드리는 큰 공사를

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건축가가 설계 초기부터 인테리어 업자와

상의하는 걸 보질 못했다.


지금 소도시에

가게 몇 채 안 되는 상가를

이렇게 짓고 싶다면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

"돈이 남아도냐?"

"너 미쳤냐?"




이러한 실정을 알다 보니,

페르시아의 바자르를 보며 부러움이 앞선다.

건축가가 전권을 가졌으며

터치와 시간 제약과 자금 압박을 안 받는 상태에서

자유로이 모든 역량을 구사할 수 있었으리라.

아마도 정부에서 

주요 수출품 장려를 위한 차원에서

건축가를 대우하며 지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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