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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Oct 05. 2021

괴테도 흠모한 시인,  하피즈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중세 페르시아의 3대 시성 3






괴테도 흠모한 시인

하피즈 

(1325년 경 ~ 1389년 경)









노래하라

이것이 굶주린 이 세상이 필요한 것이니까.

웃어라

그것이 가장 순수한 소리니까.





모든 아이들은 신을 알고 있다네.

혼내는 신이 아니야,

하지 말라는 신도 아니야,

이상한 짓을 하는 신도 아니야,

오직 네 단어만 알고 그것을 반복하는 신이지.

"와서 나와 함께 춤추자,

와서 나와 함께 춤추자."





나는 어젯밤에 행복 바이러스에 걸렸어.

별빛 아래서 노래를 할 때는

행복 바이러스에 잘 걸리지

그러므로 나에게 키스해줘.





시간이 이렇게 흐른 뒤에도 태양은 지구에

'당신 나에게 빚졌어'하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라.

태양은 그 사랑으로 하늘 전체를 밝힌다.





행복이 당신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당신을 찾으러 골목길을 달리고 있다.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

내일 밤의 주제도 사랑

사실 우리가 나눌 대화의

더 좋은 주제를

나는 알지 못하네

우리 모두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는야 구멍,

그리스도의 숨이 지나는 피리의 구멍.

그대여, 이 음악을 들어보게나.





아침이다,

대지가 미소를 짓고 있누나.

그렇지, 어젯밤 나와 동침을 했다지.





모두 다 꽃


장미는 어떻게

심장을 열어

저의 모든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주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빛의 격려 때문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언제까지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위대한 영혼으로 채워진 시



이슬람 중에 수피 파는 

비교적 예술적 표현에 관대했다.

수피였던 하피즈는 

신앙을 사랑에 빗대어 표현하거나 

서정시(가잘)의 형식으로 

사랑의 애틋함 등을 

수려한 문체로 표현해 내었다. 

그가 '셔크 나버트'라는 소녀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이 그의 시작(詩作)에 대한

동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앙과 사랑 외에도 

그는 평화와 서민에 대한 연민, 

성직자의 위선에 대해 노래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평생 시를 썼다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는 

지금 현재 500여 편 정도만 남아 있는데, 

이는 결코 많은 수치가 아니다. 

페르시아 문학 연구가들은

그의 시에 대한 정교함을 감안한다면, 

그가 시를 쓴 뒤에도 많은 시간 동안에 

검토와 수정을 거듭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자형목(紫荊木)은 

재스민에게 진홍 술잔을 건넨다


수선화의 눈은 

아네모네에 대한 수심(愁心)에 빠진다



그가 그려내는 정교한 비유와 은유와

원 시 그대로의 간결함과 상상력을 

외국어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작가이자 번역가인 '더리우스 아슈'리는, 

"현재 우리에게 있어 하피즈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놀랄 만큼 어렵다. 

아마도 많은 이란인들에게도 

하피즈의 시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페르시아 문학 연구가인 '나르기스 페르저드'는, 

"하피즈의 단어 사용을 보면 

그가 시를 쓰는 데 있어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20세기의 어느 편집자도 

하피즈가 쓴 단어들보다 더 나은 단어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언급을 했을 정도이다.



하피즈는 언어적인 면에서 

감동적이면서도 우아했고

상징적이면서도 

다의적인 페르시아어를 구사했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명상을 바탕으로, 

기쁨과 슬픔, 정열과 용기 등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시의 구조라든지 언어 사용, 

상징적인 내용 등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페르시아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적인 시인이다.

위대한 영혼으로 채워진 시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통찰한 시인



그의 시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에 의해 

<디반>이라는 시집으로 편찬이 되었고, 

이들 가잘의 중요한 주제와 모티브는 

삶의 즐거움이나 사랑과 술 등이었으며, 

이들 시는 페르시아어에 유려함이나 

다양한 형식과 상징성을 부여하였기에, 

이후 페르시아 문학의 고전으로도 

여겨지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많은 경험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통찰한 사람으로서, 

인생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정열, 

관조와 성냄, 삶에 필요한 잠언 등을 

시를 통해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감각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사랑, 

이승의 것과 천국의 것, 

경쾌한 것과 성스러운 것 등 

대립적이고 양극적인 요소를 

훌륭하게 결합시켰으며, 

이를 통해 페르시아 시문학의 지적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였던 것이다.





술에 대한 찬미



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은 내 곁에 라면.. 

군주도 노예일 뿐!




이태백 등의 동양권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하피즈는 무슬림이었지만 

자유로운 사상 덕분인지 

유명한 술고래였다고 한다. 


사랑을 술에 비유하였고 

포도주를 주제로 '신의 이슬' 

혹은 '불타는 루비'라는 시를 짓기도 했을 정도. 

사실 중세 이슬람권의 상류층 중엔 

율법을 어기고 술을 즐긴 이들이 꽤 있다... 

경건함으로 유명한 '살라흐 앗 딘 유수프'도 

술탄 즉위 전까진 술을 즐겼다.







이태백





참고로 술 얘기 나온 이 대목에서

추가할 인물이 있다.


이태백은 페르시아 타지크계 사람이다 라는 

이란 학자들의 설이 대세이다.

이태백의 이름은 '이백'이고 '태백'은 '자'이다.

사전에는 이백의 출생지가

'수야브'라고 나온다.

수야브Suyab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부근이다.

당시에 그쪽 지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당나라의 경계에 해당하고

수야브는 당나라 주둔군이 있던 땅이었다.

하지만 그곳 주민들은

페르시아 타지크인들이었다.

이태백의 아버지가 그 지역의 주지사였으며

태백이 5살 때 당나라 장안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주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이태백의 시대를 전후해서 보면,

아랍에 의해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이에 따라 이란계 민족들이 

아랍 세력에 밀려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일부 이란 학자들은 7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에 수많은 페르시아 타지크 인들이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역사서에도 이 왕조의 수도로

수천의 페르시아인들이 출현했다는데,

시기적으로 8세기로 언급되어 있다.

이 시기는

이태백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페르시아 타지크계 지도층 사람들도

아랍과의 전쟁에 밀려

중국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란 학자들에 의하면,

당나라 때는 페르시아가 문화 선진국으로

황실부터 서민까지 페르시아 문화를

선망했다고 한다.

당나라 황실이 

페르시아 혈통이라는 설도 비춘다.

페르시아계 수피즘이 중국의 도가 사상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알게 된다면

중국의 문화 전반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대목에서 드는 생각이

중국 역사 이래 한족이 지배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이다.

한나라와 명나라 정도?

중국이 내심 역사 콤플렉스가 있을 만하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역사 조작을

국가 차원에서 하는 듯하다.


중국은

이란 학자들의 발표에 

역사 왜곡할 생각하지 말고

이란계 민족과 그들의 문명이 

고대 중국의 정신문화와 학문을 

얼마나 풍요롭게 가꾸었는지에 관해 

새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와 러시아에게도 마찬가지다. 

동북 공정으로 중국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러시아 학자들인 것도 

희한한 일이다.

주위 모든 나라에 역사 민폐국이 

중국인 현 상황이다.

여러 정황과 증거가 있는 한 

역사 왜곡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창피해야 할 일이다.





붉은 장미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밤꾀꼬리는 그 내음에 취해 버렸으니,


오! 술을 숭배하는 수피들아,

환희 속으로 초대하도다.


돌처럼 단단하게 보였던 회개의 밑동,

보라, 유리잔이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를.


술 가져오렴.


뚝 떨어진 왕궁에서, 목자(牧者)든,

군주든, 술에 취해 있든 정신이 말짱하든,

잠시 머무를 곳,

두 짝 문의 여인숙은 길 떠나기 위해 필요하네.

그대의 처소가 고관의 대문이든 반월형 문이든,

비천하든 고귀하든 생은 영원하지 않네.


즐거움의 경지,

고통 없인 도달하지 못하니.


그렇소.


신이 내린 재앙의 계명으로 

태초의 날은 성립되었네.

있고 없음에 속으로 괴로워말고 

즐거이 보낼 진데.

존재하는 모든 완전함도 무릇 공(空)이기에.

재상이 되는 영화(榮華),

바람같이 날쌘 말과 새 이야기,

재상이 가진 모든 것 사라지고

그들로부터 그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네.


날개와 깃털로 

길(道)에서 날아가지 말라.

화살도 잠시 공중으로 올라가나 

이내 땅으로 떨어지네.


하페즈!

당신 갈대 붓의 언어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

당신 얘기는 입에서 입을 통해 

꼬리를 물고 전해 지네. 






내 눈에서 바다를 이루고,

참을성을 사막에 던지고,

이 일로 생긴 내 마음을 바닷속에 던지네.

죄과(罪過)로 쪼그라든 마음으로부터 

한숨이 터져 나오고,

내 한숨 같은 불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태우네.


기쁜 마음의 근원은 연인이 그곳에 있음이니,

스스로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리니,

오! 달덩이와 모자 같은 높은 지위의 

태양이시여,

옷의 매듭을 푸소서.


그대 발끝까지 닿은 긴 머리 타래처럼,

그대 발에 내 뜨거운 사랑의 머리를 던지려니,

내 하늘의 화살도 참았으니,

술 주오,

취할 때까지 오리온 좌의 화살통,

허리띠의 매듭을 풀어 제칠 테니,

'이 움직이는 땅'에 남은 술과 찌꺼기를 쏟으며,

짙푸른 하늘에 아쟁의 울림을 쏟아붓네.


오, 하페즈여! 

시대에 의지함은 잘못이고 실수이니,

왜 오늘의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더냐.








티무르와의 일화



하피즈 : 

만약 시라즈의 튀르크 여인이 

나의 마음을 훔친다면, 

나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그녀의 사마귀와 바꾸겠소.


티무르 : 

나의 빛나는 검으로 

살만한 세상을 복속시켜 

내 처소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꾸몄는데, 

그대는 시라즈의 일개 여인에 난 

점과 바꾸려 하는군!


하피즈 :

아아, 세계의 지배자시여, 

이러한 방탕함으로 말미암아 

보시다시피 제가 이러한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하피즈의 재치 있는 대답에 감탄한 티무르는 

그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여 

빈곤을 해소해주었다.









괴테에게 미친 영향



괴테의 세계 문학 개념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준 문학이 페르시아 문학이며, 

그중 중세의 시인 하피즈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므로, 

괴테는 하피즈의 시집인 

<디반 Divan>을 읽고서 

큰 감명을 받아 서양과 동양의 시를 아우르는 

<서동시집>(1819)을 내었고, 

이 책을 통해 괴테는 민족 문학의 차원에서 

세계 문학이라는 좀 더 넓은 차원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또한 괴테는 문학의 차원을 

보다 더 높이기 위해서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 

하피즈의 시를 원어로 읽어보려고도 노력했다. 

그러한 흔적은 괴테 전집 곳곳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괴테는 하피즈 시를 읽으면서 유럽 문학과는 

다른 차원 높은 정신성과 사상성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피즈가 종교적인 성찰에서 출발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차원 높은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피즈는 현세적인 삶의 중요성도 

강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마치 종교적인 듯하면서도 

감성적으로 삶과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향이 괴테의 취향에도 맞았던 것이리라.


하피즈가 즐겨 썼던 가잘은 

보통 7행 내지 14행으로 이루어진 

서정시를 통해 사랑과 삶이나  

종교와 같은 주제를 다뤘다.

이러한 시 형식은 

4 행시와 3 행시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유럽의 소네트 형식과 유사하므로, 

그런 측면에서 괴테와 하피즈 두 시인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살펴볼 때 

서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독일의 문호인 괴테는 

하피즈를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고 했다.

또한 그의 시를 일컬어 

“별빛이 반짝이는 우주와 같은 신비한 구성” 

이라고까지 극찬을 했다.


에머슨은 하피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두려운 게 없다.

그는 멀리 내다보며, 꿰뚫어 본다.

내가 만나고 되고 싶은

유일한 분이 바로 하피즈다."

에머슨은 하피즈에게 이런 찬사도 보냈다.

"하피즈는 시인들의 시인이다."


니체도 '하피즈에게'라는 시를 

썼을 정도였으며, 

요하네스 브람스도 자기 곡에

여러 편의 그의 시를 가져다 썼다.

빅토리아 여왕도 필요할 때면

하피즈를 들쳐보았다고 전한다.

'바이런'과 '앙드레 지드'도 

'하피즈'의 영향을 받았을 만큼

페르시아 문학의 최고봉에는 

'하피즈'가 서 있다.


그리하여,

중세 세계 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페르시아 문학은 찬란하였다.







자유로운 영혼다운 그의 정자 묘



아름다운 운율의 서정시(抒情詩)인 

가잘(Ghazal)의 대가로 알려진 하피즈는, 

세계 각국을 떠돌았던 사디와는 달리 

일생을 주로 시라즈에서 보냈다.

당대에 하피즈는 무자파르 왕조와 

티무르 제국 등의 궁정 시인이었으나

쫓겨났다.

한 때 이스파한, 야즈드 등지를 떠돌기는 했지만

말년에 고향 시라즈에 돌아와 죽었다. 


“시와 장미의 도시” 시라즈는 

사디(Saadi, 1190~1290)나

하피즈(1325~1389)와 같은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한 곳이다.

그들로 인해 시라즈는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도심에 위치해 있는 하피즈의 묘는,

사디의 묘와 같이 

팔레비 왕조가 통치를 하던 1953년에 

개축되었다.

이란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국민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에 대한 예우로 

울창한 숲과 시원스러운 연못으로 정원을 꾸미고, 

그 중앙의 화려한 원형 정자에

석관을 안치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묘소를 찾는 사람들의 

경건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피즈의 묘가

사방이 트인 페르시아 정자 형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하피즈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심정을

헤아려서 그렇게 조성했을 것이다.

자연과 소통되는 것이 정자요.

바람이 통과되는 것이 정자다.







하피즈 영묘 입구, 시라즈, 이란







피 모자를 본뜬 영묘 

7각 정자는 중세 이란의 돔 건축에 있어 중요한 예시이다.








영묘 7각 정자의 돔 천장 내부인 쿠폴라의 모자이크







이란인의 가정에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책이 코란과 하피즈의 시집이라고 한다.

이란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페르시아의 명시 100편을 암송한다.




종교도 이념도 시를 뛰어넘지 못한다.

혼탁한 세상을 구하는 동아줄은

시인의 순수한 마음인지 모른다.

페르시아 시인의 시 한 편이

그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게도 한다.







https://youtu.be/_0xQDCfY8TI?t=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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