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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Sep 29. 2021

경계를 초월하는 시인,  사디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중세 페르시아의 3대 시성 2




경계를 초월하는 시인

사디 

(1184 ~ 1291)









사람들이 현자에게 묻기를,

지고한 신이 드높고 울창하게 창조한

온갖 이름난 나무들 가운데,

열매도 미지 않는 삼나무를 빼놓고는

그 어느 나무도 '자유의 나무'라고 불리지 않으니

그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현자가 대답하기를,

나무란 저 나름의 과일과 

저마다의 철을 가지고 있어

제철에는 싱싱하고 꽃을 피우나

철이 지나면 마르고 시드는도다.

삼나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항상 싱싱하느니라.

자유로운 자들, 

즉 종교적으로도 독립된 자들은

바로 이런 천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니 그대들도 덧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칼리프들이 망한 다음에도

티그리스 강은 바그다드를 뚫고 길이 흐르리라.

그대가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라.

그러나 가진 것이 없거든

삼나무처럼 자유인이 될지어다.



ㅡ사디의  <굴리스탄>에서 











아담의 후예



인류는 한 몸

한 뿌리에서 나온 영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지.






위의 아담의 후예란 시는

이란의 초등학교 4학년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UN본부의 한 건물에도

다음과 같이 원본으로 걸려 있다.





아담의 후예



모든 아담의 후예는 구성원으로 서로 결속돼 있고,

같은 원리 안에서 창조됐다.

구성원 중 하나가 괴로움에 처할 때는,

다른 구성원 역시 편치 않으리라.

만약 네가 타인의 불행에 무감각하다면.

너를 인간이라 부르는 게 온당치 않으리라.








작가 소개


사디는 필명이다.

본명은 좀 길다.

'아부모하마드 모슈레포딘 모슬레흐 

벤 압돌라 벤 시라지'

그냥 필명으로 부르는 것이 편하다.


사디는 

중세 페르시아의 실천 도덕의 시인이다. 

시라즈에서 태어나 

알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다.

바그다드의 니자미야 학원에서 

이슬람의 전통적인 학문을 터득한 후에 

귀향하지 않고 신비주의 수행으로 

유랑생활로 나서 탁발승으로

약 30 년간 이슬람권 각지를 편력하여 

여러 사람과 만나 실천 도덕의 길을 

설파하였다. 


몽골이 페르시아를 침략하여

정세가 불안정했으므로

그는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전역을 방랑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도 여행했다고

작품 속에서 언급된다.

북아프리카에서 사디는 프랑크족에 잡혀

트리폴리 요새의 참호에서 일도 했다.

이 여행 중의 풍부함 경험은

아름다운 시로서 결정(結晶)되게 된다.


1256년 고향인 시라즈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70이 넘은 초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시라즈 교외에 암자를 짓고

2대 걸작 《과수원(부스탄), 1257년》과 

《장미 정원(굴리스탄), 1258년》을 집필한다.




사디도 다분히 신비주의적 색채를 

갖고 있으나,

그의 실천적ㆍ인간주의적 성격 때문에

루미처럼 신비주의에 철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건전한 미를 사랑하는 도덕적 미의 실천자인

그의 특성은

총명하고 쾌활하며 인정미가 넘치는

그의 성향과 만나 다른 독특한 맛을 냈다.












작품 ㅡ <과수원>, <장미 정원>

시집 ㅡ <서정시>, <송시>


<과수원>은 서사시적 운율을 지닌 

완전한 운문시이며,

이슬람교도들에게 추천하는 

기본 덕목(정의·관대·겸손·만족)을

적절하게 표현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슬람교 테르비시들의 행위와

무아경의 관행에 대한 고찰로 구성되어 있다.




 <장미 정원>은 주로 산문체이며

일화나 개인적인 기담(奇譚)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격언, 충고, 해학적인 생각 등을

담은 다양한 짧은 시들을 

군데군데 삽입하고 있다.

<장미 정원>은 중세 이래 최고의 교양서이고

페르시아 산문학의 극치로 평가되고 있다. 

문체는 간결·청신하고 해학(諧謔)을 섞어 

많은 일화와 격언이 실려 있다


<장미 정원>에서 설파하는 도덕은,

선의의 거짓말은 선동적인 진리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의주의와 유사하다.

사디는 인간 실존의 모순성에 대해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왕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들의 운명은

데르비시들의 자유로움에 대비시켰다.




서유럽 사람들은 주로 <과수원>과

<장미 정원>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만,

사디는 훌륭한 찬양 시인이자 

서정 시인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인간의 경험을 그려내는 

훌륭한 일반적 송시를 많이 지었고,

<사디 전집>에는 서정시, 

송시, 만가(挽歌)가 있고 

특히 서정시에는 우수한 작품이 많은데

사랑과 술을 주제로 즐겨 읊었고 

자연에 대한 감정 표현이 특색이다.

1258년 몽골 침입 이후 바그다드의 몰락을

비탄스러워한 특별한 송시도 지었다.


그는 또한 많은 아랍어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딱딱한 양도 논법을 피하려는 작품 경향과 함께

작품 속에 묘사한 인간의 친절과 냉소주의의

독특한 배합과·해학과·체념 등의 특성이 있다.








사디 작품의 특성


페르시아의 시와 문학 분야에 있어

사디는 가장 명확하고 유창한 달변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이란 문화권 내에서도

가장 전형적이고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다.

사디의 그러한 명성은 

유려한 표현, 

소박한 문체,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시를 

썼다는 데에 있다.


지난 8세기 동안 그가 남긴 우화, 격언, 시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명언이나

지혜의 말로 수없이 반복되어 

사용되어 왔으며

그의 식견은 우리 시대

가장 박식한 학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많은 시인들이 사디의 공기를 숨 쉬고,

사디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며,

각자의 문화에 사디를 통해

새로운 생기와 의미를 불어넣어 왔다.

사디라는 페르시아의 불꽃은

그렇게 스스로 빛나며 세상을 밝히고 있다.


그의 책들은

깊은 학식과 귀중한 인생의 경험을 기초로 한 

실천 도덕을 설명한 교양서로, 

페르시아어의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페르시아어와 문학은 이란 문화가 지닌 

자비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으며 

세계인들은 이러한 특징을 

사디의 저술 속에서 직접 보아왔다. 


<굴리스탄(장미 정원)> 서문에

'사디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폭넓게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황금을 쫓듯 

그의 문장을 쫓는다’고 하였고

또 다른 일화에서는 

사디의 시가 신장(新彊)의 도시 

카슈가르에서도 유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랍 지역에서나 비잔티움에서는 

번역자나 학자들이

사디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사디의 작품을 번역하고, 

아제르바이잔 지방과

몽골 일 한국 통치자들의 수도였던 

타브리즈(Tabriz)에서는 사디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문체를 모방했다.

이것은 전체 이슬람권에서의 드높았던 

사디의 인기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디는 세상을 떠난 후 

두 곳의 거대한 이슬람 제국, 

즉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도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파르시어(Farsi, 페르시아어)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인도와 중동의

문화표현 수단이었고 

사디의 <굴리스탄>과 <부스탄>은 

파르시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1984년, 인도에서 출간된 사디 출판 목록은 

어머 어마한 양을 기록하고 있어서

인도에서 사디의 드높은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굴리스탄>은 302본, <부스탄>은 179본,

<판드나마>는 176본이나 된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 내에서의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사랑은

사디 생전에 <굴리스탄>을 터키어로 번역되었고

지금도 터키어 번역본은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런 번역본 이외에도 <굴리스탄>  비평 본이

나왔다는 것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사디 작품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파르시어를 중요한 문화교류의 수단으로 

삼았던 두 거대 이슬람 제국의 국경을 넘어, 

사디의 명성은 서반구에까지 알려졌으며, 

<굴리스탄>은 파르시어로 쓰인 책으로는 

최초로 유럽어로 번역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이 

가장 사랑했던 시가 바로 사디의 시였다. 

그들은 사디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고 

아름다운 표현에 매혹되었다. 

1634년,<굴리스탄>이 프랑스어로 

최초로 번역되어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사디의 작품을 맛볼 수 있었고, 

1년 후인 1635년에는 프랑스어 번역본을 

독일어로 중역하여 출간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어로 완역되었다. 

사디의 작품은 차츰차츰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굴리스탄에 관한 에세이를 남겼고 

볼테르는 매우 정열적으로 굴리스탄을 연구했다. 

바이런은 사디를 가장 위대한 라틴어 서정 시인인

카툴루스(Gaius Valerius Catullus, 

기원전 84~54년)에 견주었다. 

괴테는 

<서동시집(西東詩集, West-Östlicher Divan)>에서 

<굴리스탄>의 마지막 장을 인용함으로써 

<서동시집>을 끝맺고 있다.



사디는 말한다.


호흡에는 두 가지 축복이 있으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는 것

들이마시면 몸이 움츠려졌다가 내쉬면 

다시 홀가분해진다.

삶이란 이렇게 놀랍게 뒤섞여 있는 것

신께 감사하라, 신이 너를 힘들게 하더라도

또 신께 감사하라, 

신이 너를 자유롭게 해 주더라도.



빅토르 위고는 <동방 시집(Les Orientales)>에서 

<굴리스탄>을 인용했다. 

괴테는 독일의 대문호요,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대문호이다.

사디는 그들의 관심과 주목과 칭송을 받은 것이다,

이 현상은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전 유럽의 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에머슨(1803~1882)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디는 페르시아어로 말하지만

호머,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만벨과 유사하며

그의 언어는 항상 정갈하며

모든 민족에게 호소력을 지닌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디의 사랑 속에는 인간애가 있다.

그는 애정, 우정, 용기, 자비심, 관용, 친절, 

순수 그리고 신성한 은혜의 시인이다……

수 백만의 영혼 중에서 사디의 영혼은 

가장 돋보이며 독보적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어서 

그가 하는 말을 통해 빛이 전달된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1862)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사디 사이에 중대한 차이점은 없는 것 같다. 

그는 이란이라는 한 국가에 국한된 시인이 아니며 

고대에만 속하는 시인도 아니다. 

내게 그는 낯설지 않다. 

그의 사상은 내 생각과 비슷하므로 

그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사디의 시 전집인 <굴리야트>은 

지혜의 보고이자 지식 패러다임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쿨리야트(Kulliyat)’라고 알려진

사디가 남긴 작품은 지혜의 보고이자

하나의 지식 패러다임으로서

그 독창성은 시간이 멈추는 그날까지 보존될 것이다.







1645년경 굴리스탄 책의 표지

















시라즈의 사디 영묘



아주 마음에 드는 건물이다.

모스크의 돔과 페르시아의 테라스와

이슬람식 회랑을 응용한 길쭉한 복도를

현대화한 건축물이다.



입구에  테라스는 바람이

온몸으로 소통될 것이고

비가 와도 나와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밖과 소통되는 왼쪽에 붙은 회랑은 

햇빛 드는 남쪽 아취를 막으면

북향의 아뜰리에로 적당하겠다는 꿈을 꿔본다.

이래서 직업은 못 속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어머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꿈꾸는데 돈 드냐?"



























사디의 영묘 내부와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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