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이란 문학은 아랍, 인도, 터키 등을 아우르는
이슬람 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이다.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월등한 유산과
실크로드 문화 산물을 이어받은 이란인들은
글짓기에 탁월해 세계적 시인들을 배출했다.
그들은 아랍 문학까지 포용하면서
이슬람 문학사의 주류를 형성했다.
튀르크 제국을 비롯해
중근세 이슬람 세계의 궁정 문인들은
이란어 작품을 짓는 것이 필수였다.
이란 문학의 뿌리는
3천여 년 전 조로아스터 경전 등의
고대 페르시아 운문, 문헌집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이어 4~5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창조된
여러 기록물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라비안나이트>는
바로 사산조 문학이 낳은 산물이다.
시를 바탕으로 한 이란 문학사의 본류는
9세기 중앙아시아 부하라에서 일어난
사만 왕조 때를 기점으로 본다.
수피즘 교단의 신비적 영향을 받은
이 왕조 치하의 이란 동부에서는
10세기 루다키와 아브 슈크르 등의
서정시 선구자들이 나왔다.
11세기엔 <샤나메>로 서사시의 아버지로
이란에서 추앙받는 피르다우시 (935~1020),
4행 시집 〈루바이야트〉의 지은이
오마르 하이얌 (1048 ~ 1131),
13세기엔 신비 시의 대가 루미가 나타났다.
몽골 침입으로 이란 북동부가 쑥대밭이 되자
13세기부터 문학의 새 중심으로
떠오른 곳이 남부 시라즈다.
사랑의 시 ‘가잘’ 현식과
2행 대구체의 낭만 시 ‘마스나비’는
쉬라즈 출신 사디와 하피즈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이란의 독창적 장르다.
하지만 시라즈에서 꽃 피운 이란 문학의 본거지는
16~17세기 동쪽의 인도로 옮겨간다.
궁정에서 페르시아어를 주로 썼던 사파비 왕조가
종교시 외의 문학 후원을 외면하자
우르피, 칼림, 사이브 등 많은 이란 시인들이
조국을 등진 채 인도 무굴제국의 궁정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까지 가잘과 마스나비 같은
이란 특유의 장르는
오히려 인도에서 애송되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술과 촛불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시면
이것들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사랑에 걸어라
아니거든, 이 무리를
떠나거라
반쪽 마음 가지고는
어전에 들지 못한다
신을 찾겠다고 나선 몸이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에 머물러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참인가?
만약 빵을 찾고 있다면
그대는 빵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영혼을 찾고 있다면
그대는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비밀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찾고 있는 그것이라는 것을.
나는 돌로 죽어 꽃이 되었다.
나는 꽃으로 죽어 짐승이 되었다.
나는 짐승으로 죽었다, 그리고 사람이 되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을 통해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변한 적이 없건만
죽음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건만
내가 사람으로 죽으면
그다음 나는 한 줄기 빛이나 천사 이리라.
그리고 그 후는 어떻게 될까.
그 훙 존재하는 건 신 뿐이니
다른 일체는 사라지리라
나는 누구도 보지 못한,
누구도 듣지 못한 것이 되리니
별 속에 별이 되리라.
삶과 죽음을 비추는 별이 되리라.
오, 신이여
모든 사랑하는 이들로 만족케 하소서
그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주시고
그들의 인생으로 축제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가슴으로 하여금, 당신 사랑의 불길
안에서 춤추게 하소서
오, 내 사랑
당신이 나의 연정을 일깨웠습니다
당신의 손길이 이 몸을 간절한
소망으로 가득 채웠고, 이제
더 이상 나는 당신과 떨어져 있지 못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
제발 비오니, 나로
하여금 더 기다리게 마소서
당신 안에 녹아들게 하소서
잘랄루딘 루미는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이자 이맘이자 수피 철학자이다.
압바스 제국 시대, 본래 태어난 고향은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Balkh)이다.
그의 가족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이동하다
바그다드와 메카를 거쳐 1228년에
콘야에 이르른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1231년부터 1240년에
다시 콘야로 돌아오기 전까지 이곳저곳에서
방랑을 한다.
1244년 종교를 초월한 떠돌이 늙은 수도승
샴스 우딘 타브리즈와 운명적으로 만나
불과 며칠 만에 내적 혁명을 경험한다.
이후 시인으로 변모해 죽을 때까지
수많은 시를 통해 '세상에 나 아닌 것은 없다'는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노래한다.
그의 노스승 샴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얘기한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오직 그만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기 불꽃처럼 타오르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두 눈이 멀어 버렸다."
샴스가 루미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돈을
다른 세상의 돈으로 바꾸는 자이다."
샴스는 루미의 책들을 물속에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루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책을 잊어라."
루미는 평생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말하며
페르시아어로 된 시를 썼다.
장년의 그가 주로 활동하고
이슬람교 신비주의 파인
수피즘(sufism)의 메블레비 교단을 창립한 곳은
당시 셀주크 튀르크의 수도였던
아나톨리아(롬) 지역의 '콘야'이며,
그의 무덤도 그곳에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름 뜻은
'빈치의 레오나르도(사자)'라는 뜻이다.
빈치는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다.
'잘랄루딘 루미'는
'루미의 잘랄루딘'이다.
여기서 루미는 롬 지방이다.
고로, '롬의 잘랄루딘'이다.
'롬'이란 당대의 무슬림들이
동로마 제국이 점유했다 해서
아나톨리아 지방을 부르던 명칭이다.
그러므로
'아나톨리아의 잘랄루딘'이 된다.
잘랄루딘 루미의 주요 활동 무대가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이었음을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잘랄루딘 루미는
불후의 명작 <정신적 마스나비>를 완성하였다.
이 전 6권으로 된 방대한 신비주의 시집은
'페르시아어의 코란'이라고도 평가되며
그의 사상적 성전(聖典)이라 하겠다.
외면상은 시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배후에는 절대적인 신의 사랑과
그것을 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 감미로운 서정 시집들이 있다.
그는 중세의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페르시아 문학의 최고봉이란
평을 듣는 시인이다.
4만 수 이상의 초월시가 전해진다.
루미는 생전에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모두 신비주의 철학이 바탕이라 하겠다.
루미의 철학은 아래의 짧은 시로 압축할 수 있다.
오라, 오라!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오라!
방황하는 자든 불을 섬기는 자든 우상숭배자든 오라
우리 학교는 희망 없는 학교가 아니다.
맹세를 100번이나 깨뜨린 사람도 좋다. 오라
잘랄루딘 루미의 시는 아주 방대한데,
대부분이 사랑과 신과의 만남,
그리고 쾌락을 노래하고 있고
상당부문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나
기독교의 특징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주류 이슬람에서는
이단시되는 주장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수피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민들 특히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던 터키에서
루미의 인기가 압도적이라
오늘날에도 터키인들은 루미의 어록이나
시 한 두 편은 외우고 다닐 정도다.
그래서 수피교는 터키 쪽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루미의 시는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어로 쓰여있으며
'디완'(diwan)이라고 부르는
4 행시로 주로 썼다.
디완은 2개의 행이 1연을 구성하고,
2연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로
각운과 음보를 엄격하게 지키는 시인데
루미의 시들은 그 엄격한 룰 안에서도
자유로운 시어 사용으로 인해
시성이라는 추앙받게 된다.
루미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로서
명상과 기도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루미는 다음과 같은 7가지 교훈을 남겼다.
1.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2.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3.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4.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5.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6.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7.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의 사상과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랑은
유럽 지성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
19세기 대문호 괴테 등도
직ㆍ간접으로 루미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럽 지성들이었다.
루미의 가르침은
'사랑과 신과의 합일'로 대표된다.
사랑에 대해서는,
루미는 그게 기독교인이든
조로아스터 교인이든 간에
제자들에게 항상 청렴하고 항상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신과의 합일에 대해서는,
에고를 눈 녹듯 녹여야 하고
개인의 쾌락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실질적인 체험을 중시 여긴다는 것이다.
녹은 눈처럼 살라.
너 자신으로부터 너 자신을 씻어내라.
실질적인 체험을 중시 여긴다는 점들은
같은 이슬람 다른 파들과는 많이 다르다.
신과의 합일을 위한 실질적인 체험에 대한
예를 들자면,
수피즘에 입교하는 사람이
테케(수피 종단의 수도원)에 들게 되면
기존의 멤버들은 신입을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만찬을 열고, 부엌에 거주하게 하면서
신입으로 하여금
온갖 재료와 향신료들을 맛보게 하고
각각의 재료들이 갖는 특성을 배우게 한다.
이것은 각각의 재료들이 불이나
기타 조리 등의 방법으로
원래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요리'가
탄생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또 한 예로,
'세마'라고 불리는 수피교의 원형 무용 또한
스스로 반복해서 회전하면서
그 속에서 신과 만나는 경험을 위해서
춘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 방식의 수련 등을 통해
신인 합일을 체험할 수 있다는
지혜로운 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슬람 중에서 소수파이지만
가장 진보한 종파가 바로 수피 파이지 싶다.
인도 힌두교에서도 무슬림과는 이질감을 갖지만
수피즘만은 인정하기에
이슬람 수피파라 하지 않고 따로 수피교라 부른다.
잘랄 웃 딘 루미는 이슬람의 소수파인
수피즘 신비주의의 수업에 진력하여
신학자로서 '메블레비'라는 파(派)를 창설하였다.
메블레비파의 최대 존칭은 '메블라나'이다.
'우리의 스승' 또는 '나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루미 이름 앞에 메블라나를 붙여
메블라나 루미(우리의 스승 루미)라 하는 것이다.
매년 12월이면 터키 '콘야'에서
'메블라나 루미 축제'가 열린다.
그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한 취지이다.
메블라나 루미는
관용과 상생이라는 두 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해
종교와 인종, 국가를 초월한
포용적인 세상을 꿈꿨다.
어려운 코란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영적 수련을 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논리로
민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터키를 넘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네스코에서는
루미의 사상과 철학을 기리는 의미에서
탄생 800주년이 되던 2007년을
‘루미의 해’로 선정하고
메블라나 루미가 만든 회전 명상 춤
‘세마(Sema)’도
2008년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루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수피들의 춤으로 알려진 '세마'이지 싶다.
세마 댄스는 루미가 창설한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 교단인 '메블레비'에서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춤이다.
세마 댄서는 세마젠이라 하는데
비석을 상징하는 모자를 쓰고
에고의 죽음을 상징하는 흰색 수의를 입고
속세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한다.
그 뜻도 심오하지만
지구의 회전 방향과 같이 왼쪽으로
돌고 돌면서 신 앞에서 하나가 되고,
모든 사람과 신의 창조물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마음가짐에 숙연해진다.
게다가 춤을 출 때 원으로 펴지는 치마는
우아하기 그지없다.
세마젠은 코란을 읽고 기도한 후
'네이'라는 대나무 피리 소리에 맞춰,
빙빙 도는 춤을 춘다.
이는 도는 속도를 점점 빨리 해
무아지경에 빠지기 위함이다.
신을 체험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한다..
음악을 부정적으로 여겼던
기존의 이슬람교에 비해 수피즘에서는
음악의 신비성이
서로 다른 음의 조화라는 점에서
수피즘의 사상에 걸맞기 때문에
장려하고 또한 자주 노래를 부른다.
루미가 세마를 만들 경위는 다음과 같다.
장터를 거닐다가
리듬감 넘치는 망치질 소리에서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에 행복에 빠져
두 팔을 뻗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이 춤은 그를 추종하는
콘야 지역의 메블레비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계승 전승되고 있다.
세마는
오른손을 하늘로, 왼손을 땅으로 향하게 하고
한 방향으로 계속 회전하며 추는데,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알라를 영접하고
땅으로 뻗은 왼손으로는
알라의 평화, 사랑, 관용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적게는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이상 회전하며
무아지경에 이르는 모습을 보면
그 숭고함이 느껴진다.
같은 방향으로 끝없이 돌면서
언어를 떠나 신과 합일 상태에 이르는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신과 교감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두바이에 사는 친구가 수피 춤에 대해 얘기한다.
"댄스로 24시간도 계속 돌고 또 도는 무용이야.
일종의 마약을 흡입한 것 같은 몽롱한 상태로
계속 도는 '향정신성 댄스'라는 문제가 있다 하여
다른 많은 아슬람 국가에서는 금지하고 있고.
다만 터키나 두바이 등지에서는
관광지에서 이 춤이 아주 인기가 있지."
촬영 차 이란과 터키와 이집트를 방문했던
사진작가 친구는 이집트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 상으로 이집트 세마는 관광 상품화된
느낌이 든다.
우아하고 고상함을 찾아볼 수 없어서 이다.
사진일지라도 진지하게 회전해야
신비감이 캐취 되건만.
아무튼 신은 평온이다.
신과 합일된 세마젠의 표정은 평온해야 한다.
루미가 활동하던 시대에
아랍어로 써진 코란은
비아랍권의 서민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이었다.
더욱이 이슬람교에서는
오해와 왜곡을 막기 위해 코란을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에 따라 이슬람교는 아랍 중심의
지배자와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신앙적 도구로 한정되어 가고 있었다.
루미는 코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 수련을 거치면
신과 교통 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세마’이다.
그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누구든지 신의 경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교통 하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마는 민중들에게 퍼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마는 루미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위대함이다.
대나무 피리 '네이'
터키 콘야의 세마
이집트의 세마
https://youtu.be/xK5Ge1KxcDU?t=131
Konya Mevlana Kültür Merkezi, Semazen Gösterisi, 15 Ekim 2011
www.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