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희 Nov 16. 2021

동남아의 '힌두 불교'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동남아의 '힌두 불교'



수마트라섬


스리비자야 불교 왕국(650 ~ 1377)


바다 비단길(Silk Voyage)을 따라

힌두교가 동남아에 전파되고

힌두교 동남아의 왕국들이

수마트라 동부 해안과 말레이반도에 생겨난다.

이어서 말라카 해협 쪽 수마트라 중남부에서

불교문화를 앞세운 스리비자야 왕국이

발흥한다.

스리비자야 불교 왕국은

700년 넘게 존속하며

동남아 바다 비단길을 관장한다.




자바섬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 왕국

산자야 힌두 왕국

마쟈빠힛 힌두 불교 왕국(1293~1527)


스리비자야와 같은 시기에 자바에서는

산자야(Sanjaya) 힌두 왕국과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 왕국이 등장하였다.

832년에는 산자야 왕과 사일렌드라 공주 간에

결혼 동맹이 이루어졌으므로

자바의 주도권이 산자야 힌두 왕국으로 넘어갔다.


자바섬에도 스리비자야 불교 왕국이 있었다.

마쟈빠힛 왕국(1293~1527)이

스리비자야의 뒤를 이었는데,

자바를 장악하여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을 육성한 해양부 동남아의

대표적인 ‘힌두 불교’ 왕국이었다.




동남아 해양부의 중심이자

인구 밀집 지역인 자바는

이처럼 일찍이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터전으로 변모하였다.

자바에서 만개한 힌두교와

힌두 문화와 공존하는 원시불교를

‘힌두 불교(Hindu Buddhism)’라 칭하는 까닭이다.




발리


발리에는 15세기경 중동부 자바 지역

마자빠힛 힌두 불교 왕조가 몰락을 하면서

힌두 승려와 왕족들이

예술가와 장인들은 데리고

대거 발리로 피신을 해온다.

그로 인해 발리에는 현재 93%에 달하는 인구가

힌두교를 믿고 있다.

때문에 이슬람을 믿는 자바 섬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전쟁으로 한 왕조가 몰락했을 때

어떻게 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가 집단 이주이다.

한국에서도 삼국 시대에 그런 일이 

빈번했다.

일본 규슈부터 홋카이도까지 

밑에서 위로 쭈욱 답사를 해보고

한국의 삼국 시대가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한국에서는 사라진

삼국의 고급 상류층 문화가 일본에

남아 있었다.


규슈로 간 가야는

왕조가 몰락해서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김수로 왕은 그의 일곱 아들들을

지리산 칠불암에서

그의 외삼촌 장유화상과 수련을 하게 한 다음,

규슈로 가서 규슈의 신들이 되었다.

영토 확장으로도 이주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조의 몰락이든 영토 확장이든 

이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집단 이주인 것이다.

한 민족의 이동인 것이다.

발리도 그러한 집단 이주로 

거대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발리에는 가는 곳마다

발에 걸리는 게 힌두 사원과 탑이다.

발리에는 자그마치 2만여 개의 힌두 사원이 있다.

과연 '신들의 섬'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남태평양의 타히티는

태평양 특유의 열대 기후로 끌어당기나

오랜 기간 서양화된 데다 물가가 비싸,

많은 관광객들이 실망한 채 돌아간다.

인도는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로

‘신성스럽게’ 포장됐지만,

되레 ‘난해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발리섬은

아시아와 태평양이 적절히 혼합된 곳이다.

고대 힌두 문화가 멋지게 존재하고,

남태평양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나른한 풍광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이 

즐겨 찾기 시작한다.


발리가 이런 느슨하고도 멋진

이미지를 갖게 된 사연이 있다.












서양인들이 빚어낸 파라다이스


19세기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때 발리 토착 왕조들은

집단 자결로 거칠게 저항한다.

1908년, ‘야생’의 발리는 기나긴 투쟁 끝에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그들은 발리의 ‘힌두 문화’를

이슬람주의를 막는 전초기지로 개발한다.


발리를 향한 서구인들의 시선은 

조야하기 짝이 없었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을 관음 하며 

‘원시적인 생명력’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는다. 

발리의 섬 문명은 그들의 애초 계획대로

되어 간다.

신성한 문화에서 

휴양과 예술을 빙자한 관광과 유흥 문화로.

발리의 고유한 진정성 있는 종교 문화의

정체성이 탈색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발리는 그들이 원하는 ‘파라다이스’로 변모한다. 

유럽 사람들은 발리를 문화적, 자연적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생각한다. 

전 세계의 여행가와 

이국적 삶의 흥분을 경험하고자 했던 

상류층이나 

20세기 초 유럽 문화의 대안을 찾기 위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사람들은 중간 정도의 부로도 

하인을 거느리고, 

자동차, 예술품과 

원주민 마을의 그림 같은 발리 스타일의 

집을 살 수 있는 환경에 매력을 느낀다.


발리를 찾은 이들은 

가슴을 드러낸 아가씨와 어린 소녀 무용수가 

발리를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서양인의 이미지 창출에 힘입어 발리의 여성은 

소녀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벗은 몸으로 예술작품에 등장한다. 

여성적 이미지로서의 인도가 

영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면, 

발리는 독일계에 의해 

여성적 이미지를 가지게 된 셈이다.




독일과 다른 유럽 관광객들은 

‘야만적인 발리’를 ‘여성의 발리’, 

즉 가슴을 드러낸 

여인들이 웃음을 짓는 섬으로 채색한다. 

벌거벗긴 다음에는 

‘세련된 발리’, 

즉 섬의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곳으로 바꾼다. 

독일의 학구적 전통은 

발리에 문화적, 예술적 풍요의 이미지를 

제공하고, 

나중에 여러 인류학자는 

이를 이론적으로 보강한다.


자유로움을 갈구하는 예술가들에게 

‘원시적 생명력’을 간직한 듯한 발리섬은 

낙원과도 같게 된다. 

세계의 예술가들이 밀려들자

해안에서 멀지 않은 내륙 '우붓'에

예술가 마을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적도 부근의 화사한 꽃들은 

예술을 옹호하고 

힌두 신앙을 극대화시키기에 좋은 소재였다. 

오늘날 발리는 방문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꽃이 뿌려지는 풍경에 매료된다. 

머리에 꽃이 올라앉은 소녀들은 

꽃 쟁반을 머리에 이고 의례를 연출한다. 

욕조에는 꽃이 그득하다. 

이러한 풍경은 사진으로 연출돼 

온갖 미디어로 소개된다. 

그래서 발리의 욕조를 떠올리면, 

언제나 욕조 그득 차 있는 

열대의 꽃잎을 연상한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만들어진 전통’이다.




의도된 ‘원시적 낙원’ 이미지


기존의 전통은 

‘원시적 낙원’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동원되기도 한다. 

1910년대 발리에 연쇄적으로 닥친 재난에

식민 당국이 보여준 조치가 그랬다. 

1917년 지진이 일어나 

1000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다음 해에는 ‘스페인 독감’이 발리에도 창궐한다. 

1919년에는 발리 남부에 생쥐가 대량으로 발생해 

곡물 수확량이 격감하기도 한다. 

당시 발리 사람들은 연이은 재난을 

‘신들의 진노’로 받아들인다. 

신들에 대한 의례를 정성껏 하지 못했던 게 

재난의 이유라는 것이다. 

발리인들은 신들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상향 드다리’(빙의 무용) 같은

주술적인 의식을 적극 수행한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당시 성행하던 신앙 행위에 주목한다. 

이를 중국이나 유럽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발리 전통문화’로 해석하고, 

재건 과정에서도 ‘순수성’을 복원하는데 

혈안이었다.

발리를 

‘고대 자바 문화의 박물관’으로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였다. 

폭력의 역사를 탈색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1920년대부터 발흥했던 이슬람 민족주의에 

대응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발리를 자바 섬에서 

밀려드는 이슬람주의를 

차단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고, 

발리 고유의 ‘힌두 문명’을 강조하는 데 

앞장선다.




발리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초기 단계에서 

1930년대 초까지 발리는 

관광지도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했고, 

당시 유명했던 자바의 부속 섬 정도로 인식됐다. 

이 시기에 발리의 이미지들과

섬의 명물은 벌거벗은 여인들이었다. 

1920~1930년대의 발리는 

부유한 세계인 유럽과 미국에서부터의 

도피처였다. 

부자와 유명인사들이 파리, 베를린과 

뉴욕의 살롱의 연장선에서 발리를 찾는다. 

젊은 동성애자에게 

온화한 자연의 섬인 발리는 

엄격한 규칙의 유럽과는 대비되는 곳이었다.


발리는 점차 관광 여행지 중 

가장 로맨틱한 곳으로 발전됐고, 

섬에 관한 책과 출판물들이 발간되기 시작한다. 

발리의 새로운 풍경, 소리와 냄새에 열광한 

장기 거주자 또는 여행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발리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위해 서둘러 글을 출판한다. 

그들은 미국과 유럽에 

세계 이국적 장소를 소개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잡지에 

글을 실는다. 

책과 기사의 제목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발리의 

경향을 잘 나타냈다. 

‘열대 동화의 나라’ ‘자연의 파라다이스’ 

그리고 ‘신들의 섬’이 그 예이다.


서양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한다. 

현재의 관광 중심이 된 음악(가믈란 등), 

무용(레공, 께짝 등), 

회화의 양식이 이때 사용된다. 




세계의 많은 예술가들이

발리의 분위기를 작품 제작에 이용한다.

한국의 천경자 화백도 그중 하나이다.

그녀의 초기 그림을 보면 

상당한 재능이 있는 작가이다.

발리에 장기 체류 후에는 작품이 변모한다.

이국적인 국적 불명의 여인,

머리를 꽃으로 치장한 작가 본인인 듯한

여인이 컬러풀한 화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생소한 원색의 이국적인 작품으로

대중 인기 화가를 넘어

원로 화가로 자리 매김 한다.

그만큼 화가가 없던 시대였다.




냉전시기 히피들의 마지막 해방구


1950년대에 들어서서 작가들은 

‘파라다이스 발리’에 

보다 복잡한 문화적 의미를 가미한다. 

할리우드는 

1930년대 발리의 요소를 빌려서 

이미지를 재배열한다. 

1970년대 한국에도 소개돼 큰 인기를 끌었던

<남태평양>(1958)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발리는 태평양전쟁 가운데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수 있는 

미국 군인의 파라다이스, 

‘Bali-Hali’로 재탄생한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지나간 후에 

발리는 또 다른 이미지로 채색된다. 

인도의 첫 수상이자 새롭게 부상하는 

비동맹국의 영웅이었던 네루는, 

발리를 ‘세계의 아침’이라고 칭찬한다. 

발리를 수식하는 말들 가운데 

세계인의 뇌리에 가장 확실히 각인된 

말이었다. 

발리는 유럽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의 영역이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매력적인 발리의 이미지를 지지한다. 

수백 개의 문화와 수천 개의 섬을 통일한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발리에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 

그의 어머니가 발리 출신이었다. 

덕분에 1920~1930년대 

수카르노가 통치하던 시절 

인도네시아인들도 발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대통령은 발리에 궁전을 지었으며, 

벽에는 발리의 그림을 걸고 

발리 무용수로 접대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 신정부는 

발리 관광에 전기를 마련한다. 

1966년 일본에서 받은 전쟁배상금으로 

발리 최초의 리조트인 

‘사누르 발리 비치 호텔’을 건설하고, 

이듬해에는 응우라라이 공항을 개항한다. 

결정적으로 1962년 호주에서 상영된 

서핑 영화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된다. 

히피들은 서핑과 함께 본국에선 금지된 

마리화나와 동성애 등을 공공연히 즐긴다. 

이 모든 것이 

파라다이스로서의 발리의 이미지를 

고무시켰다.


여행사는 발리 매력에 관한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냈다. 

발리에 대한 책을 출판하거나, 

기존에 집필한 책을 재출간하기도 한다. 


수십 년간 지속된 홍보와

섬을 압도하는 여행 관련 글과 학술 논문은 

발리의 이미지를 반박할 수 없게 만든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대통령, 수상, 인류학자, 

영화감독과 시인들이 총동원된다. 

풍부한 고대 문화가 있는 

‘이브처럼 옷을 입은 태양에 그을린 여성’과, 

‘모든 것이 평화로운 중세사회’, 

‘만나는 모든 사람이 무용수이자 

예술가’인 데다가 

‘매일의 시작과 끝이 

찬란한 자연과 함께하는 곳’이 

바로 당대의 발리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스파’라는 말도 

발리가 1980년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탄생한 말이다. 

지압과 아로마 오일을 이용한 마사지. 

발리의 전통 약초를 이용한 

각질 제거 마사지, 발리의 목욕 문화, 

그리고 전통 의료술에 기초한 

약초 치료가 버무려져 

발리의 스파가 만들어졌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나

전쟁과 직접 통치나, 식민 통치가 있어왔다.

그리고

근래 서구 열강의 전 세계적인 식민 통치가

계속되고 있으니, 현재도 진행 중이다.

식민 통치는 지배자 국가의 의도에 따라

방향이 잡아지고 결과가 난다.

그동안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은

지배자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손쉬운 통치를 위해

통치를 당하는 나라를

어수선하게 만들어 와서 그렇지 싶다. 


발리의 경우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다.

통치국의 그런 의도가 있었으나

자바가 이슬람화 되면서 

강한 이슬람 세력에 발리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해서

힌두교를 육성시키게 되고

그들의 필요에 의해

휴양지로 개발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휴양지는

이제 인도네시아에 속한 

세계의 휴양지가 되었다.

잘 살게 된 특별한 나라인 우리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에 이런 고급진 휴양지가 있음에

반응이 좋다. 

그러면 된 것이다.




현재 발리의 아궁 화산은 

분출물을 토해내고 있다. 

아궁 화산만큼이나

발리의 기묘한 문화와

해양 문명사와 인문 환경도 

아직도 새롭게 생성되는 중이다. 

상업성과 맞물려.








발리 렘푸양 사원의 천국의 문







이런 문을 본 적이 있는가?

처음 보고 입이 벌어지고 까마득해진다.

이미 생각을 넘어서 있다.



정신을 차리니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찬느 분타르'라는 문.

위가 뚫려 있는 문이다.

하늘과 통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문짝이 없으니 

문이라기보다는 통로(파사지)?

탑이 양이라면 이 문은 음이다.


별별 생각이 다 나기 시작한다.



내가 아는 한

지구 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이다.

신이 하늘로부터 

저 문으로 내려온다면

빛으로 가득 찰 것이기에.



















발리 바투안에 있는 힌두사원 정문, 이 음양의 조화를 보라!











작가의 이전글 인도 역사 요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