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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18. 2022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5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근대부터의 중동 상황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5



중동 지역 판세를 보면 볼수록

세 나라로 압축된다.


터키, 사우디, 이란


이 세 나라는 민족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인

혈통과 언어와 정체성이 확립되고

넓은 땅까지 확보하고 있다.  


특징은

터키는

자부심이 넘치고 열정이 맹렬한 수준이고


사우디는

이슬람을 배출한 나라로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 수호자의 나라이며


이란은

세계사에서 가장 오랜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로

자부심이 남다르고 똑똑하기 그지없다.









이란 1/2



이란은 역사와 혈통과 언어적으로 볼 때

인도 유럽어족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북부,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사이 지역에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이동해

생긴 아리안계 백인 혈통이다.


고대 키루스 대제의 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1979년까지 

2,508년의 페르시아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온 나라가 이란이다.

이는 아랍 쪽과는 인종 자체와

그 안에 든 DNA가 틀리다는 얘기이다.

현재 중동에서 기간 사업과 제조업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이지 싶다.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1501년 ~ 1736년)


15세기 말 16세기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국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 시각에서 

역사와 문화 예술을 보건대,

유럽의 식민지 쟁탈과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16세기의 세상의 중심은 중동이었다.

해양 시대 전인 실크로드의 육상 시대에

오스만, 사파비, 무굴

이 세 융성한 제국들이 팽팽하게

세를 유지한 덕에 

세상은 평화롭고도 풍요로웠다.

세계사에 다시없는 시대였지 싶다.


이 세 나라를 화약 제국이라 한다.

화약 제국

(火藥帝國, Gunpowder Empires)들은

화약과 화기의 발명으로 

상당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유럽 세계와 달리 

화약의 도입으로 인한 변화가 

군대 밖의 사회구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화약 제국 시대에 

안정과 번영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 가운데에 뛰어난 문화의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이 

중심을 잡고 있어서라 할 수 있다.

실지로 사파비로부터 

오스만 튀르크는 행정을 

무굴은 문화 예술을 지원받았다.

사파비 제국의 시대인

1501년부터 1736까지 235년간은

중동이 가장 평화로웠던 시절이라는

결론이다.


또한 사파비 제국 시대는 

바로 직전 티무르 제국에게는 

건축 예술을 제공했고

바부르에게는 

군대와 문학과 건축에 영향을 주어

무굴 제국을 세울 수 있게 해 주었으며

터키에는 고상한 이슬람인 수피즘이 

꽃 피우는데 기여를 했다.

과연 중동의 르네상스 시절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동시에 영국의 산업혁명과 

유럽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준비가 된 

서구 유럽의 나라로

세계의 중심은 이동하게 된다.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 시대(1779~1925년)


페르시아의 찬란했던 사파비 왕조의

몰락 이후 혼란 상태가 오래간다.

카자르 왕조가 생긴다.

페르시아 영역에 있던 

정교회 조지아 주민들은 

19세기 초 독립하고자 한다.

카자르 왕조 군대가 진압한다.

정교회 수장국 러시아가

이를 빌미로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신무기를 앞세운 러시아가 승리한다.

패배 결과 카자르 왕조는

광대한 카프키스 영토와 동부 조지아

지역을 러시아에게 빼앗긴다.


이 시기 카자르 왕조를 통치한 

'파드 알리 샤'는 이란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영국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영국 입장에선

영국은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페르시아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온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부터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기 시작한다?

과연 그럴까?

결과는

페르시아 안에서 두 강대국들의

세력균형이 팽팽하게 이루어져

페르시아는 

어느 한쪽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이다.


나약한 카자르 왕조는

영국에서 차관을 들여와 

어떻게 해보려 했으나 

빚만 지고 나라를 영국에 넘기려다

국민 저항에 부딪혀 못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같이 새로 세워진

터키와 이란.

그러나 출발부터 틀리다.

터키는 '아나튀르키'라는 위대한 인물 하에

독립전쟁을 통해 자력으로 외세를 물리쳐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서 

나라를 세웠다.

반면에 이란의 팔라비 왕조는

영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영국의 페르시아 현지 사령관인

아이언사이드 장군이 임명해서 세워졌다.

그가 임명한 레자 칸은

영국 사령관 자신의 부관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는 페르시아에서 물러났고

영국은 페르시아를 식민지화하려다

레자 칸을 세워놓고 철수했다.




1902년 이란에서 영국인 시굴자가

중동 최초의 유전을 찾아냈다.

그는 즉시 독점권을

이란 카자르 왕에게 사들였다.

계약 내용은

총매출액이 아니라 순익의 16%였다.


돈 주는 사람은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으니

순익이 유리한 법이다.

받을 사람은 매출 기준 퍼센티지가

확실하다.

머릿속에서 들어올 돈이 

쉽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영국인 시굴업자가 제시한

순이익에 대한 일정 지급 계약 조건은

이란이 앞으로 석유로 

얼마나 벌어들이게 될지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1923년까지 영국이 이란 석유에서

4,000만 파운드를 벌었으며

반면 이란은 약 400만 파운드를 

벌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영국은 이란에게 10분의 1만 준 것이다.


레자 샤 시대에

이란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기존 16%에서 20%로 소폭 상승했지만

영국의 막강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페르시아 팔레비 왕조

레자 샤(1925년 ~ 1941년)


레자 샤는 강력한 독재정치를 통해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꾼다.

카자르 왕조와 차별화하기 위함이다.


정책은 강한 군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국방력 강화에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다.

1920년대 이란은 

지출의 약 40%가 국방비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국민들은 시큰둥했다.


1930년대에 레자 샤의 눈에

독일 나치 정권은 영국을 견제할 수 있는

적절한 파트너로 보였다.

경제 협력으로 영국의 개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당연히 독일은 반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영국은

소련군에 전쟁 물자를 보내기 위해

이란 내의 독일인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한다.

샤는 이를 거부한다.

1941년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침공한다.

레자 샤는 폐위된다.

새 왕위는 레자 샤의 아들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승계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란의 석유산업은

중동 최대 규모였음에도 

대부분의 수익은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가 

가져가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페르시아 팔레비 왕조

팔레비(1941년 ~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샤한샤(황제)이자, 

이란(페르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1941년 9월 16일 황위에 오른 후,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약 38년 동안 재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국정 목표는 '위대한 문명'으로 

급진적 근대화와 산업화로 

이란을 강대국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팔레비는 

1963년부터 석유를 팔면서 획득한 외화와 

미국에 의한 경제원조를 기반으로 

'백색혁명'이란 개혁을 시도한다.

팔라비는 토지개혁과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사문제 해결, 여성 참정권의 확립과 

아동 결혼 금지, 교육개혁, 농촌개발, 

문맹 퇴치로 이란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친미노선을 추구하면서 

서방세계의 자본이 

이란에 투자하게 만들려고 했다. 

또한 팔레비는 1960년대에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를 이용해서 

반체제 운동을 탄압하며 개발독재에 나섰다.


특히 미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때 이란은 미국과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자연히 미국의 우방인 한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당시 한국-이란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테헤란로도 이 시기에 생긴 거리명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 많은 교류를 했을 정도로 친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다른 아랍 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우디와는 팔레비와 사우디 국왕이 

서로 친서를 주고받을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팔레비가 계속 집권을 했다면

중동에 막강한 자유 경제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판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신 영국과 미국에게 석유 값은 

계속 뜯겼을 터이다.


문제는 석유이고 

영국과 미국의 욕심으로 귀결된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모사데그의 좌절


1951년 왕정 시절, 

이란에서 민족주의가 들고일어나서

'무함마드 모사데그'가 총리로 임명된다.

그는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이란을 절대 왕정에서 입헌 왕정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모사데그는 이란 석유를 

국유화해 버린다.

영국과 미국계 지분을 

박탈하고 쫒아내 버린다.

모사데크는 석유의 수익을

경제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국은 해외 석유회사들을 담합시켜

이란 석유를 거래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이란 내 모사데그 인기는 

치솟았다.

이에 영국은 미국과 공모해 모사데그를

제거하기로 계획한다.

미 국무장관은 

그를 '미치광이 모사데그'라고 말했고

1953년 8월 말에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를 가택연금시킨다.

이 과정에서 거리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

그때 CIA는 작전을 통해

모사데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팔레비의 아들 리자 샤 팔레비를 

이란 왕으로 복원시켰다.

이란 국민들은 그 과정을 다 지켜봤다.


이 CIA 쿠데타 사건은 

이란인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일이었고

무슬림 세계는 분노했다.

그동안 영국 제국에게 당했고

이제는 미 제국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란의 반미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리고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모사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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