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이란 2/2
다시 왕권을 가지게 된 팔레비 왕은
미국의 의도대로
백색 혁명(근대화 혁명)을 한다.
팔레비는 이란을
아예 서구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토지 개혁을 시행한다.
모스크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한다?
이란의 성직자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나라에 빼앗기면서
반발 운동을 전개한다.
또 하나 건드렸던 것은
수천 년 간 경제를 운영해 왔던
검은돈을 운영하던 바자르 상인들이다.
종교인들과 금융자본가들을 건드린 것이다.
두 세력은 결탁을 한다.
그래서 1979년에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물이 넘치면 흘러내리는 법이다.
서구의 석유 지분을 박탈해서
모사데그가 추출되고
종교인과 경제인에 피해를 주어
팔레비도 쫓겨나고.
호메이니의 프랑스 망명 시절에
팔레비는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 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못했다.
나중에 팔레비가 결국 그에게
당하는 결과에 이른다.
청치에선 제거 가능할 때 못하면
화살은 돌아오곤 한다.
1938년의 호메이니
호메이니의 등장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아야톨라'는
페르시아어로 '알라의 신호'라는 뜻으로
시아파 고위 성직자에게 주는 칭호이고
'루훌라 호메이니'는 '호메인Khomeyn 출신
루홀라라는 뜻이다.
호메이니가 성이고 이름은 루홀라이다.
호메이니는
이란의 초대 라흐바르(최고지도자)이다.
197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해
사실상 오늘날 이란의 국부 취급을 받는다.
이전까지 이란을 통치하던
팔라비 왕조를 전복시켜
왕정을 폐지한 것까진 좋았는데,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면모로
오늘날 특히 여성에게 꽤나 억압적인
이란을 만든 인물이라 비판도 상당하다.
팔레비 왕정 당시 중동권에서 터키와 함께
가장 세속적인 축에 든다고 평가받던 이란은
그의 치하에서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적 냄새가 풍기는
모습으로 돌아가버렸고,
일종의 나비 효과로
이후 주변 이슬람권에
이슬람 근본주의 광풍을 불게 만드는 데도
일조했다.
결국 정치적 능력과는 별개로
이란과 이슬람 세계가
시대에 역행하는 데 단단히 한몫한 셈이다.
오늘날 이란에선 국부급이다 보니
전 화폐에는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으며,
테헤란 신 공항의 이름도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이다.
이맘 호메이니?
이란의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손인 알리,
후세인 외 그 후손들을 포함한
12명을 이맘으로 본다.
호메이니는 12 이맘이 아님에도
이맘 칭호를 공식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란에서 그를 12 이맘급으로 위대하게 여긴다.
한때는 호메이니를 '마흐디(구세주)'라고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호메이니의 권위는 전설적인 12 이맘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건 이란 내부 얘기이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호메이니의 사상은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샤리아에 기원해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쿠란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는
이슬람 성직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왕조 타도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슬람 혁명의 요지는?
이란은 혁명을 수출하는 나라고
혁명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계념을 가지고 있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장악하고
'이슬람 법학자 통치 제재'를 내세운다.
명칭은 '이슬람 공화국'이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세속 정부 위에 신권 정부가 존재하며,
세속 정부는
군 통수권을 가진 신권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체제이다.
이란 사람들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견제가 되고 있다고 얘기한다만,
무슬림이 아닌 사람에게는
알 수 없는 독재 세계로 비친다.
신권 정부의 수장이자
국가 전체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성직자를
'파키'라고 부른다.
파키 밑에는 12명의 협의체가 있다.
이들을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라 한다.
이중 성직자 6명은 파키가 임명하고
전문가 6명은 선거로 선출한다.
선거는 8년에 한 번 있다.
파키는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에서 선출하며
또 그들만이 쫓아낼 수 있다.
이 체제는
종교 성향도 매우 극단적인 편이라
시대착오적 발상도 많이 하였고
근대화된 많은 이란인들을 탄압하였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란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았던
모하메드 모사데그를
세속주의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개인적으로 대단히 싫어하였다.
호메이니는
"만일 그가 정권을 계속 잡았다면
그는 이슬람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반면,
수니파인 사우디의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인다.
사우디에서는 왕족이 아닌 한
권력을 잡을 수가 없지만,
이란 체제에서는 평민이지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사우디 왕실 입장에서는
굉장히 겁나는 일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반도,
자국의 동부 걸프 해 연안에
300만의 시아파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혁명 수비대
이란의 혁명으로
이러한 이슬람 정치체 재가 생겼고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1983년에 만들어진다.
혁명 수비대는
국내 부대와 해외 부대로 이루어져 있다.
해외 부대는 이슬람 확산을 목적으로 한다.
이란의 옆 나라 이라크는
시아파가 60 퍼센트이다.
소수 수니파였던 이라크의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제거되고
혁명 수비대는
이라크에서 정치도 참여하며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는
현재 이란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 있다.
1979년 이전까지는 미국은 중동에서
밀고 내려올 공산주의를 방어할 목적으로
4개의 나라를 가지고 있었다.
사우디, 이스라엘, 터키, 이란이었고
이란의 팔레비 왕조에 신임하고 있었다.
냉전 시대에 인구 8,500만의 이란이
안정적으로 지켜주지 못하면
그위로 카스피해 쪽은 거의 다 소련권이므로
공산주의가 걸프만까지 내려올 것을
불안해했다.
호메이니가 들어서고
이란은 반미로 급회전해서
이란의 미 대사관 직원 52명을
1년 3개월 동안 억류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배우 숀 코너리가 호메이니와 은근히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1979년 일어난
호메이니의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나라 중 하나였다.
1979년 이후로 미국과 관계가 악화된 이후로
또 미국의 맹방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왕조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이다.
이러한 이란은
중동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패권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핵개발과 탄도 미사일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종교 정치적으로는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뿐만 아니라
레바논의 시아파 헤즈볼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이란의 혁명 수비대의
대외 활약으로
사우디 주변국들로 하여금
수니파의 대부인 사우디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란은 풍부한 에너지 자원과
우수한 인적 자원으로 한국 못지않게
다이내믹한 나라이다.
절대 만만하지 않다.
오바마 정권은 '이란 핵합의'라는
사상 초유의 합의를 이뤄 놓고
이란과 관계 정상화가 되면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 전략을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트럼프 들어 무산되었다.
이란이 미국에 의해 자금이 동결되면서
한국이 이란에 줄 석유 자금이
한국에 묶이게 되고
그로 인해 한국의 배가
이란에 억류되기도 했다.
이란은 동결이 풀릴 때까지
석유를 안 팔 수도 없다.
이란은 신뢰 가는 한국에게는
결국 외상 거래를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