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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Feb 17. 2023

강진 - 백운동 별서 정원 11, 12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강진 - 백운동 별서 정원 11, 12



별서 담장 안 전경


별서의 담으로 둘러진 내부는 

언덕에 조성이 되어있어서

구조상 4계의 석단으로 

층층이 일렬로 반듯하게

5등분 되어 나눠져 있다.

일명 '세로로 가로 분할'이 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석단을 쌓아서 계를 만들어 

언덕이나 비탈을 처리하는 방식이

궁궐 왕비 거처 후원에서 봤던 

화계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 조경의 기본방식 중 하나인 것이다. 




떡 썰기로 치면 '가로 썰기'랄까?

유학자의 별장다운 정갈한 면모는 좋으나 

우리 같은 예술가의 눈에는 

그다지 선심을 사는 구도는 아니다.

자연스런 변화와 다양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우리는 획일성은 딱 질색한다. 

제도화된 국가가 양식만을 고집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주지 않는 한  

예술 작품이 나온 걸 본 예가 없다.

이집트의 그 형식성에서 

예술미를 바랄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마 동일한 간격으로 나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전히 점수를 잃는 일은 면했다고 본다.


조경이 제대로 되어 있어 

그러한 분할 단면이 

시야에서 흐트러지게 되면 모를까,

옷 안 입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의 뜰은 

호감을 사기에는 너무 노출이 심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우리는 올 누드보다는 

적당히 가려진 것에서 섹스어필이 더 되나 보다. 

황량한 바닥이 주는 어색함과 이질감이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고 

밖에서 맴돌게 했었을 수도 있다.

조경은 집안의 안사람과 같은 것이다.

안사람이 푸근하지 않으면 

남자가 밖으로 도는 법이다.




별서 안에 조경이 안 되어있는 것도 그렇지만

집들도 요즘에 복원한다고 새로 지어놨지만,

재목을 기계로 깎은 것이라 영 식상하다.

전동 기계가 나오기 전에는 

나무를 깎기로 일일이 깎아서

손맛이 있고 자연스러웠다.


여기가 뭐 관광단지 휴게소랑 

다른 게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급급해서 

옛 맛은 온데간데 없어진 꼴이다.

하기야 국보 1호 남대문도 

뚝딱뚝딱 기계로 깎아 지어내 버리는데 뭘 바라랴.


이제 옛것을 제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최소한의 예의로 시간을 들여서라도 

근접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방법은

사업 자금을 넉넉히 짜고

공사 스케줄을 여유 있게 해서

일꾼들에게 기계 사용하지 않고 

옛 도구로 깎아서 다듬게 하면 되겠건만.


유럽에서는 요란하기만 한 성당도 

몇 백 년 대를 이어가며 지은 것들이다.

자본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는 

건축이나 조경이나 모뉴먼트들은 어림없다.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문화 사업은 

연예나 체육이나 영화산업과 같은 

프로모팅을 동반하는 것과는

근본에서 달리해야 된다.

빨리빨리 정신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프러스로 무심의 손맛이 어우러져야

자연주의가 완성되리라.

그러한 바른 인식이 퇴색되는 듯하여 씁쓸하다.

의식이 문제인 것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


5등분이 된 담장 안 1단에 해당하는 터에는

크기가 다른 방(方) 자형 연못이 두 개가 있다.

그리고 연못들을 연결하는 물길이 각이 져서 나있다.

연못을 만들기 위해 물을 끌어들인 것은 알겠으나

이름은 엉뚱하게도 '유상곡수'이다.


그렇다면 물길이 연못 물을 대는 용도 외에

더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유상곡수의 

'상(觴)'은 잔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유상(流觴)'이란 

잔을 내되 물에 흘려보내 낸다는 뜻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잔을 물에 띄워 흘려보낼 수 있는 굽어진 수로'이다.


유상곡수의 역사는 

신라 경주의 포석정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형상화되기 전에 풍습이 있었을 터,

그 근원은 개울가가 아니겠는가 싶다.

개울가에서 하던 술놀이를 

더 많은 손님과 편안하게 하고자

집안에까지 끌어들인 것이라 본다.




물은 속성상 아주 미묘한 단차만 주어도 밑으로 흐른다.

평지에도 물길에 단차만 주면 흐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연못의 물이 들어오는 물길을 따라가 보니

솟을대문 옆 담을 밑으로 넘어가고 있다.

솟을대문은 언제나 정문을 의미한다.

정문으로 나가니 바로 개울이다.

물길은 개울의 한 웅덩이에서 물을 끌어와

담을 넘어 별서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


정문 앞이 바로 술판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것이고

이 별서의 존재 가치는 

바로 정문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것이다.

별서에 들기 전에 계류를 감상하고 

정취에 정신을 취하게 하고

대문을 들어서서 연못을 앞에 두고 앉아

유상곡수를 따라 들어오는 술잔을 들어 

몸을 취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취기가 오르면 시를 지어 남겼을 것이다.

요새로 치면 '완벽한 힐링의 실현'을 

구현했다고 봐야 하겠다.




술자리에서 돌아가며 시를 지어 내던 그런 전통은

우리 웃세대 문인과 시인들 사이에서는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남겨진 유명한 시들도 꽤 있었다.

그중에 근래에는 허무주의 낭만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란 시가 대표적인 시로 알려져 있다.


나도 한 때 낭만주의 물이 덜 빠진 시절,

일산 끝자락 수막산 남녘 밑자락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짓던 때

벌판에 논 천지인 마을 어귀의

이름 없는 동네 중국집서

옆 동 사는 조각하는 후배들과 한 잔 기울이며

시를 서로 지어 읊조려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꽤 괜찮은 즉흥 시들을 지어 만족스러웠고 

풍미 또한 있었다.

우리 바로 윗 세대는 젓가락 장단으로 

두드리며 합창하던 세대였고

우리의 젊은 시대는

술판에서 합창과 독창으로 노래를 부르던 세대이다.

그러나 이제는

노래방에서 개인기를 발휘하는 독창 시대가 되었다.


술과 창작이 공존하며 이루어지던 맥은

우리 위에서 이미 애저녁에 끊겼다.

옛 선비들의 흥취에 젖어 읊조리던 시문화를

뒤세대들이 감이나 잡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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