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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pr 12. 2023

강진
영랑 생가 5, 6, 7, 8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강진

영랑 생가 5, 6, 7, 8











영랑 생가 안채 마당


사랑채에서 안채로 건너가노라니

안채 뒤쪽으로 숲이 빽빽하니 장관이다.

마당에는 화단이 있기는 하나 

너른 마당이 뭔가 휑하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오래 가지만

마당은 사람 손이 덜 타야 

푸성귀와 꽃도 꼬이는 법이다.

마당 한가운데야 멍석을 깔고 

이것저것 말리겠지만

사람 발이 안 닫는 모퉁이 쪽으로는

풀이 있어야 자연스러운데

너무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관광지라 눈감아 봐주기로 하자.


몽골 답사 때에도

초원에 겔이라는 몽골 텐트집 주변에만 

야생초와 꽃들이 유독 있었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다 겔에 부딪쳐서

자리를 잡았으려니 가정해 본다.

그들은 풀과 꽃 자체가 귀하다 보니 

손을 대지를 않는다. 

겔 천막이 바람막이가 되어주어

꽃풀들이 다른 데 보다 키가 컸었다.

그때 본 동글 탱탱한 진푸른 보라색의

야생 엉겅퀴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인간은 자유를 주지 않으면  떠나고

자연은 사람 손을 너무 타면 

남아나질 않는다.









































안채


사랑채도 비교적 컸지만

안채도 큼지막했다.

구조 또한 특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일단 대청마루가 없는 툇마루들만 가진

팔작지붕의 집이다.

중간 보의 위치로 보아 아예 지을 때부터

대청마루보다는 방이 더 필요했었던 것 같고

대청마루 대용으로 툇마루를 

앞뒤로 알차게도 만들어 놨다.


유념해서 보게 되는 부분은

왼쪽 끝 뒷칸이 기역 자로 꺾이고

앞칸은 들어 올려진 누마루도 아닌 것이

다락마루이기에는 거시기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건축 디자인이 발달하면 할수록

평면에서 모서리(엣지) 부분 응용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 꺾인 모서리 기억 자 툇마루는 

앞면과 옆면의 폭이 동일하다.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반 칸을 따로 설계에 반영했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일자집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사방에서 다 다른 모습을 갖춘

두 채의 변칙 반 기역 자형의 합체이다.

두 채가 들어가는 방문이 틀리고

아궁이도 분리되어 있다.

입방체를 한 칸으로 잡고 계산하면

총 8+2.5=10.5칸의 집이다.


이러한 구조는

집주인의 실용성 요구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구조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노련한 목수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방들을 제각기 상황에 따라 

실용적이고도 변칙적으로 쓴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가 있다.

강진 부잣집이니 

어련히 알아서 좋은 목수를 썼을라고.


오른쪽 부엌 안에는

밖으로 아주 작은 쪽마루 입구를 가진

방이 따로 하나 있다.

누구라도 단박에 알 수 있다.

부엌일을 돌보는 부엌댁의 방이란 것을.





영랑 생가의 풍수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얻는다는

풍수의 기본 취지가 그러하다.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바탕을

풍수라는 이름에서 이미 얘기하고 있다.

바람은 체온을 빼앗아 가버려 건강에 안 좋고

몸에는 수분 공급이 중요하다는 뜻이겠다.


영랑 생가를 중심에서 놓고 보면

마당 안에 좌청룡 우백호 식으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다.

풍수의 취지에 입각해서

뒤에 둘러치고 있는 언덕과

이 집에 두 큰 은행나무가

뒤와 좌우로 제대로 바람막이를 하고 있고

안채 은행나무 밑의 우물 또한

풍수의 이치에 맞게 득수가 된 셈이다.


사랑채 왼편의 키가 꽤 큰 은행나무 밑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더위를 식혔을 정도의 공간이 되고

안채 오른쪽 구석으로 나무 밑 그늘은

장독대가 있어

그 또한 참으로 풍치가 있고 멋스럽다.


자연석 가운데를 파서 만든

인상적인 돌절구에는

이제 비가 와 물이 차고 물풀이 자생하여

그나마 풀이 없는 마당에

자연미를 대변하고 있다.


































행랑채


안채 앞마당 건너에는 행랑채가 있다.

대문 왼편에 행랑아범 방이 있고

오른편에는 곳간 3곳이 있다.


행랑아범은

결혼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다.

방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는

필시 소여물을 주로 끓이는 용도였지 싶다.

행랑아범의 중요 역할 중 하나는

행랑채에 곳간들 관리 및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곳간 두 곳은 밖으로 창살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풍이 되어야 하는 곡물들이나

재물들을 보관했을 터이고

끝에 붙어있는 광 한 곳은

창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통풍과 상관없는 재물을

쌓아 두었던 곳이었으리라.

곳간 문짝을

빈틈없는 나무문으로 짠 것으로 보아

주인이 사람들이 곳간을 보는 걸

꺼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대부 집은 이보다 규모가 더 있다.

솟을대문에 양쪽 행랑채에 길게

가마꾼이나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들이 있다.

하지만 사대부 집이라도 나라 규정상

궁궐이나 왕의 인척 되는 대군집보다

클 수는 없었고

어느 누구도 99칸 이상 집을 소유할 수 없었다.

99칸 집이라 해야 집다운 집 몇 채 못 짓는다.

집채가 적어지면 원림 규모가 작아진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작은 작품만 하도록 제한하면

대작은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정책의 모순이

건축물에서도 보여 못내 씁쓸하기도 하다.


일본에 남아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은

삼국 시대에 한국 권력 세력들이

집단 이주해 만든 것들이다.

중국 동부에 있는 화려한 치장의 건축물들은

한국의 대륙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산들이다.

그 스케일과 완성도를 조선에 와서는

모두 포기한 것이다.

뭐 때문이란 말인가?


조선이란 왕조는

그런 유교적 조건 제약으로

왕조 국가를 유지했었다.

웅장했던 고려를 포기하고

국력과 무역을 무시한 채

명나라 밑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

지리적인 안정성에만 의지해서

초기부터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조선 왕조의 무사안일만 고집한

행정 권위주의 철학자들의 나라였다.


백성이 똑똑하면 왕권에 위협이 되므로

소수의 양반을 제외하곤

대부분 백성들을 쌍놈으로 부려먹는 구조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뺏긴 근복적 원인은

이성계이다.




무슨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늘 벌어졌던 일이다.

위쪽 경포대의 맑은 물 웅덩이를 관조했던 

좀 전의 사람으로서

흥분할 일은 아니다.

우주 창조의 큰 흐름은 어찌할 수 없는 것.

역사에게도 관대할 필요가 있겠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고

그래도 근원은 고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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