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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17. 2024

한국의 건축과 미술 6  
고분벽화 2  




한국의 건축과 미술 6




고구리 건축과 미술 2

고분벽화 2



지난 고분 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돌무지 무덤(적석총)

흙무지 돌방 무덤(석실 봉토분)




무덤을 축조할 때,

돌로 덮었느냐?

흙으로 덮었느냐?라는 것이다.

돌로 덮은 것은 도굴이 어렵고

흙으로 덮은 석실은 매장물이 남아나지 못한다.


그래서

신라 고분의 경우는

적석을 하고 그 위에 또 봉토를 한

'적석봉토분'이라서,

금관들이 나올 수 있었고,

고구리의 경우는

석실 봉토분이라서  

매장물은 다 도굴당하고

대신 벽화만 건진 것이다.




적석총은 규모가 작은 것은

적석묘라고도 한다.

고구리 초기 도읍이었던 환인에는

적석묘가 많고

고구리가 커져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는

적석묘가 진화한다.

기단을 만들기 시작하고

점차 피라미드화가 되어간다.




적석총의 진화





고구리 고분벽화 요약


고구리의 고분은

현실 세계와 죽은 세계를 이어주는 공간이다.

고분의 주인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의

권세와 영화를 누리기를 원했다.

자신들의 삶과 죽음 너머의 이상 세계를

진솔하게 펼쳐놓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리 고분은

무려 2만여 기,

수장 안 된 3,000기 중,

현재 조사된 벽화가 그려진 벽화 고분은

평양 안악 지역 68기와

집안 환인 지역 23기 등

총 161기이다.



고구리 고분벽화는 3세기에서 7세기까지

4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벽화의 주제는

사회 환경과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1. 생활 풍속

2. 장식 무늬

3. 사신도 등이 선택되었다.



사신 계열의 무덤에서는

생활 풍속 그림이 함께 그려지다가

말기에는 사신 위주로 바뀐다.

그것은

현재 삶을 담은 생활 풍속보다는

정신적인 이상을 중시했다는 것이고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는 국력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 당시 고구리는 최전성기였다.



고구리 벽화 고분을 시기별로 정리하자면

전기, 중기, 말기로 나눌 수 있겠다.


전기(3세기 중엽 ~ 5세기 중엽)


ㅡ주제 : 생활 풍속


ㅡ벽화 고분


  집안 지역 :

  각저총, 무용총,

  수산리벽화분, 통구 12호분


  평양 안악 지역 :

  안악 1호분, 안악 3호분(357년),

  덕흥리벽화분(408년)


중기(5세기 중엽 ~ 6세기 초)


ㅡ주제 : 생활 풍속 / 장식 무늬


ㅡ벽화 고분

  쌍영총, 감신총, 환문총


말기(6세기 초 ~ 7세기 중엽)


ㅡ주제 : 사신


ㅡ벽화 고분

  집안 지역 :

  통구사신총, 오회분 5호 묘, 오회분 4호 묘

  평양 안악 지역 :

  진파리 1호분, 진파리 4호분,

  내리 1호분, 호남리사신총

  강서대묘, 강서중묘




주제별 고분벽화


1. 생활 풍속


5세기 초까지는

무덤 주인이 살아 있을 때의 생활 모습을

벽화 속에 옮겨 놓은 것이 많다.

이러한 거대한 실생활 풍속화는

인류 문화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것이라 하겠다.




황해남도 안악 1호분의 전각도





고구리 귀족 저택 풍경


안악 1호분의 전각도에서

고구려인들의 귀족 저택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지붕을 보아 팔짝지붕이 아니라

우진각 지붕이다.

전체적으로 직선적인데

처마 끝 막새 장식을 꺾어 강조되어

기백이 있어 보인다.





황해남도 안악 3호분, , 주방도, 357년




저택은 바깥채와 안채로 나뉜다.

앞 쪽에는 커다란 바깥채를 두었고

안채 뒤쪽에는 창고와 고깃간 등

부속 시설을 두었다.

고구려 귀족의 살림은 넉넉하다.

부엌에선 여인들이

한 상 가득 음식을 준비하고

고깃간에는 돼지와 노루 같은

짐승들이 걸려 있어 풍요로움을 주고 있다.







황해남도 안악 3호분, 357년





머릿 부분이 돋보이는 장식을 한 부인은

남편을 향해 다소곳이 앉아 있고

정좌를 한 남편은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어

이들 부부가 고위층이었음 확인시켜 준다.



남편 의상과 주변 휘장에

비싼 붉은 원색을 과감히 써줘서

인물을 강조했다.






집안시 무용총, 접객도




손님을 맞이할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주인과 손님이 갖가지 음식 시중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융성한 손님 접대 또한

넉넉한 생활의 한 단면이다.



묘의 주인공은

당시 귀족들의 머리장식으로 알려진

백라관(흰 비단 관)을 쓰고 앉아 있다.

주인공 뒤에는 두 명의 시종이 서있고,

그림 맨 아래에는

여덟 명의 시녀들이 늘어서 있어

그림만 봐도

주인공의 신분이 꽤 높으리라고 추측된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 무용총(舞踊塚)의 무용




고구리의 춤은

고구리의 세련된 문화 의식과

예술 성향을 가늠하게 한다.

남녀가 나란히 서서

장단에 맞추어 긴소매를 나풀거리고 있다.



고분 벽화에서 확인된 악기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를 망라하여

서른 가지가 넘는다.

경순고와 통나팔은

그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악기이다.

고구리인이

음악에 매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리인들의 풍속


안암 3호분, 수박희(태껸)




고구리인은 씨름과 수박희도 즐겼다.

수박희의 손가락 벌리고 취하는 동작이

오늘날의 태껸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무용총의 무용도의 아랫사람들이

여럿이 있다. 이 벽화에도 그렇다.

이들은 관람객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 시대 김홍도의 씨름 장면이

씨름꾼들과 관객들을 모두 보는

조감구도라면,

이 벽화는 관객을 따로 측면에서 보고

밑에 합쳐 놓은 나열식 구도이다.





집안 장천 1호분, 수렵도





고구리에서 사냥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행사였다.

왕이 정규적으로 주체하는 사냥은

고구리 제일의 놀이이며 군사 훈련이었다.

짐승을 적으로 상정한

일종의 모의 전투를 통해

기마술과 같은 전술을 훈련시켰으며

그 포획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것이다.





벽화 속 신분과 지위

그리고 생전 활동 지역



평남 덕흥리 고분




덕흥리 고분은

2km 떨어진 곳에 강서 삼묘가 있는

고분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덕흥리벽화고분은

광개토호태왕 때인 408년이라는

절대연대가 뚜렷하게 명문으로 남아 있어

5세기 초 고구리 고분의 구조나

벽화양식을 알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고분이다.




북벽 천장에 남아 있는 명문의 내용을 보면,

주인공은 허베이 성(華北城) 일대인 유주(幽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왼쪽 벽에 유주 자사를 알현하는

13 태수들의 지역명이 인물화 위에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모두 산시 성 북부와 허베이 성 중부 등에 있는

지명들이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 근처이니,

이 벽화는 광개토호태왕 때

북경 근처를 중심으로

산시 성 북부와 허베이 성 중부를

지배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나중에 고구려 영토를 다시 그려야 될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소수의 한족들이

한나라 때부터 얼마나 오랜 세월

역사 날조에 매달렸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 단면이다.



이것은

고구리 수도인 평양성이

지금의 북한 평양에 있지 않고

북경 근처였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북한 평양의 성에서

각석이 발견되었는데

분명 한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 북한 평양 고구려 성벽이 한성임을 밝히고 있는 각석




광개토호태왕 때

고구리의 수도 3곳을 정리해 본다.



평양성(북경 근처)

국내성

한성(북한 평양)




그럼, 왜 북경 근처 유주 자사가

무덤은 멀리 덕흥리에 썼을까?

그건 묏자리 쓰는 지관의 영역이다.

옥녀봉 밑 덕흥리가 안전하고

풍수에 걸맞은 자리라고

권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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