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성 베네딕도회 신부이자 한국학자인 그는
1909년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어
20여 년간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어를 습득하고
특히 미술 연구에 몰두해
최초의 한국 미술 통사(通史)인
‘조선미술사’를 1929년에
독일과 영국에서 출간한다.
에카르트는 이 책에서 조선 미술의 특징을
‘놀라운 간결성’이라고 규명한다.
“과장과 왜곡이 많은 중국의 예술이나
형식이 꽉 짜인 일본 미술과 달리,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전적이라고 할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철학적 사고의 독일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미는 간결했던 것이다.
2003년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열화당)를
번역 출간한 권영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에카르트는 조선미술에서
그리스 미술의 특성을 발견함으로써
조선 미술을 고전 미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며
“예컨대 석굴암 부조상들은
극히 정신적이고 고귀한 작품으로서
중국에는 비교 대상이 없다고까지 했다”라고 말한다.
에카르트가 최근에 조명되기 전에는
한국의 민예품을 사랑한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와
'조선어 소반(1929년)과
'조선도자명고(1931년)'를 저술한
한국 도자기에 진심이었던
조선 공예 연구자 아사카와 다쿠미
(1891-1931) 정도였고
한국인으로는 고려청자 전문가이며
한국 최초의 미학자이자 동양고고미술학자이고
조선 미술사 논총(1934년)을 저술한
고유섭(1905~1944) 선생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에르하트는
한글과 한국 미술 전반인 통사를
연구하고 다루었다는 점에서
무게가 남다르다 하겠다.
에르하트는 한국 문화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말한다.
''고구리의 사신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이다."
현무도, 강서대묘
사신 이전의 풍수에는
'아'가 확장되어 큰 원(랑)이 된다는
아리랑 사상에 의해
아리랑 지형을 으뜸으로 쳤다.
'아'는 한 점 하늘(진리)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반대로 '아'에서 나오면 우주 창조이다.
아리랑의 큰 원은 두 개의 속성으로 나뉘는데,
그것이 음양이고
음양은 또 편리 상 또 쪼게져 넷으로 구분하고
그 넷이 가운데 '아'와 운행하는 원리를
오행이라 했다.
아리랑 > 음양오행 > 오신(1+ 4신) > 사신
그러한 완전 자연적인 성곽 같은 아리랑 지형을
몽골 답사 때 많이 확인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하이항 지역이었다.
한국에서는 천불천탑이 있다는
전남 화순의 천불동이
그러한 대표적 지형이라 하겠다.
주작도, 강서대묘
청룡도, 강서대묘
사신은 본래 사방(四方)의 방위신으로
하늘의 28개 별자리(28星宿) 가운데
동서남북 각 방위의 7 별자리씩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
지상의 생명에 에너지를 주는 것은 태양이다.
지상의 영혼들은
제각각 별들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하늘의 별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에는 늘
북극성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북두칠성이 섬겨졌다.
그 전통이 벽화로 이어져 내려온 나라는
삼국 중에 고구리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신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아(의식) > 북극성(천문) > 해(음양)
청룡·백호·주작·현무,
사신(四神)은 천문과 지리의 산물이다.
북방의 추운 지방에서는
풍수지리가 생존하고도 연관되기에
너무도 중요한 사항이었다.
풍수란 방풍득수의 약자이다.
사방에 산으로 둘러쳐져 있으면
바람의 찬기운을 막아준다는
기본 원리에서 출발했을 것이고
그것이 음양오행으로 분류된 천문이 더해져
사신으로 신격화되기에 이르러 섬기게 된다.
사신은 묏자리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사신 형상의 지세인
사세(四勢)에 해당되지 않거나
최선의 자리가 아닐 경우,
이를 대신하여 비보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무덤 칸 안에 그려질 때에는
방위 혹은 방향에 맞추어
좌(左 : 東)청룡, 우(右 : 西)백호,
전(前 : 南)주작, 후(後 : 北)현무의
순서로 그려진다.
말기 벽화 고분은 모두
풍수지리에 의거해
구릉 기슭에 남향(南向)으로 축조되었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6세기 중반부터 고구리에는
기존의 음양오행설 외에 불교와 도교가
유입되어 크게 유행하면서,
고분벽화의 주제도 크게 변화하였다.
특히 불교의 영향으로
연꽃이 천장 중심에까지 위치한다.
하지만 기존 음양오행과 천문 지리도
그 세를 잃지 않고
초기 고분의 천장부를 조그맣게 장식하던
사신도가
고분 널방의 한 벽면 전체를 차지하며
망자 바로 옆에서 지키는
상서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이 시기 고분 벽화의 사신은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유일한 표현 요소로
단순히 하늘 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 정도가 아닌
죽은 이의 세계를 지켜 주는
우주적 수호신이 된다.
백호도, 강서대묘
말기의 고분 벽화는
사신이 배경이 거의 생략된 벽면에
그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 벽화의 완성도가 극치에 이른다.
세련된 선의 흐름과 선명한 채색이
잘 어우러진 사신은 상상 속의 동물임에도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율동감이 뛰어나다.
초기에는 쌍으로 등장하던 청룡과 백호가
이때부터는 단독으로,
주작은 암수 쌍으로,
현무는 뱀과 거북의 자웅 합체로 그려졌다.
이는 작품이 발전 완성되어 가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고구리가 멸망한 668년 바로 직전에
고분벽화의 완성본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강서대묘 천장석의 황룡
말기 사신 벽화는
세련미를 적극적으로 뿜어내고 있다.
고구리 고분벽화는
동아시아 미술의 걸작이다.
고구리 벽화의 진수는 사신도이고
사신도 중에 최고의 작품은
강서대묘의 사신도이다.
강서대묘는
남포시 강서구역에 소재한 고분으로
강서 삼묘 중 가장 크다.
7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고분은
2단의 삼각고임돌에
봉황과 기린, 여러 서수, 연꽃 문양 등이
능숙한 솜씨로 표현되어 있고
중앙 천장에는 황룡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황룡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황룡은 본시 하늘의 중심에 자리매김 하는데,
용이 승천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은
기운이 상승해 위에 닿아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고대의 상징이다.
여기서 여의주가 바로 한 점 '아'이다.
황룡은 천자만이 쓸 수 있는 문양이다.
고구려가 황룡을 사신 가운데 씀으로써
오신이 완성되었고
그것은 음양오행이 갖추어졌음을 뜻한다.
대를 이어 명나라 눈치 보던 조선,
그 조선의 대원군은
마지막에 뭔 기세인지 허풍인지
경복궁 복원하며 근정전 천장에
황룡을 넣었다.
그리고 고종은
시청 앞 조선호텔 옆에 환구단을 건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최후의 자존심인가? 허세인가?
일말의 양심인가? 참회인가?
발버둥이라 본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 싶다.
집안시 사신총 북벽 현무도
역시 고구려 전성기의 기운찬 모습의 현무도이다.
사신총은 중국 집안시에 있는 석실무덤으로
분구의 밑변 한 변이 27m, 높이 8m의 고분이다.
이 현무도는 고구려 고분벽화 현무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림이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거북과 뱀의 모습을
섬세한 선으로 매우 역동감 있게 그렸다.
배경과의 조화가 매우 뛰어나다.
대단히 회화성 있고
완성도 있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 현무도는
완성도 있는 형태와
기운 넘치는 유려한 선과 강렬한 색상으로
환상적인 회화적 표현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신도 제작은
밑그림 > 채색 > 채색 테두리에 먹선
> 세부 다듬기 순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하면 다채로운 색채 위에
가늘지만 압축되어 힘이 있는 먹선을
자신감 있게 그릴 수가 있다.
이를 철선묘법이라 한다.
북한 평양, 진파리 1호분 모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진파리 고분군의 벽화들은
사신도란 정해진 패턴에서
최대로 자유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구상인지 추상인지
구름인지 기운인지
바람인지 흐름인지
생명의 힘인지 천상의 에너지인지
하여간 그러한 파동은
보는 이에게 내면의 잔잔한 울림을 준다.
진파리 고분군의 벽화들에는
고흐의 터치나 샤갈의 구도 같은
현대 미술의 대가들의
자유로움이 들어 있다.
고구리 벽화 제작공들은
이승에서 오버랩으로
천상의 세계를 본 것은 아닐까?
백제는 탑이나 건축이나 공예품이
그리고 고구리는 벽화가 뛰어나다.
고구리인의 사신도로써
그들의 웅장한 기상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
고구리 고분 벽화는
그렇게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668년 고구리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장 독특한 점은
초기에는 회벽에 벽화를 그렸지만
나중에는 화강암 위에
직접 색을 칠해 그렸다는 점이다.
동서양의 벽화가
대부분 벽에 석회를 칠한 바탕 위에 그린다.
화강암 위에 직접 천연안료로 정착시킨다는 것은
강한 접착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쇠나 돌이나 유리에조차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레진이라는 화학 접착제가 개발된
최근의 일이다.
그런 면에서
고구리 말기 시점에
화강암에 직접 그릴 수 있는
접착제를 개발했다는 얘기가 된다.
선인류 바위 문화에서도
주요 모뉴먼트들에는
검은색을 칠해놓은 것들이 있고
지금까지도 그 색은 유지되고 있다.
또한 몽골에 암각화들이 많은데
많은 암각화들이
절단되었거나 판판하게 만든 면에
짙은 청보라나 다크 엄버의 바탕색을 칠하고
날카로운 돌로 쪼아낸 것들이다.
추정컨대, 석회를 쓸 때
석회 가루를 물에 재놓았다가 쓰는데,
그 과정에서 석회를 가라앉히고
점성만 채취하는 비법을 발견해서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실질적인 방법은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와 같이
목재의 표면에 옻칠을 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 일이다.
무용총은 1935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 조사된 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다섯 번 외부에 공개됐다.
최근 벽화 모습은 색이 바랜 데다,
그나마 군데군데 벽면이 떨어져 나가
그 원형을 알아보기 조차 힘들다.
특히 중국 측이 벽화를 보존한다며,
화학안료막을 입혀
벽화는 지금 내부에서부터
부식돼 가는 중이라고 한다.
1,500년을 잘 버텨온 벽화들이
21세기 들어 한 순간 훼손되어가고 있다.
자연이고 문화재이고
사람의 손이 타면 그렇게 된다.
뭘 하려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한다.
물론 그게 제일 힘든 일이겠지만.
고은 시인은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써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내레이션으로 연재되어
중학교 때 등교 전에 밥상머리에서
매일 들었다.
글도 글이지만 배경에 깔리는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는
정말이지 감성을 자극했다.
그 책은 이중섭 절친인 시인 구상의 증언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중섭이 고구리 고분 벽화의 힘찬 선의
영향받았다고 나온다.
이렇듯 고구리 고분벽화의 예술성은
후세에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