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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15. 2024

한국의 건축과 미술 9  
광개토호태왕비






한국의 건축과 미술 9




7세기 중반 대륙 삼국 영역






고구리 말 시대의 국제 정세

삼국의 기록은
2018년에야 한국의 국보가 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온다.

그동안 우리가 알던 역사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사 편수회에서 
조작된 역사로 사실이 아니다.
일제는 한국의 역사를 2,000년으로 
그리고 일본의 역사를 2,700년으로 
더 길게 정하고 
한국의 영토를 한반도에 가두는 것이 
목표였다.

실제 삼국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 자체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의 국제정세는
그야말로 반전이 많아 드라마틱하고
전투력이 센 인물들이 등장해 역동적이다.

시작은 광개토호태왕의 남진 정책으로
시작된다.
호태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에게 
계속 밀린 백제는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고 대응하려 했으나,
신라는 거부하고 
당나라와 나당 연합을 한다.
백제는 당나라에 화풀이를 하게 되는데,
내부자의 밀고로 어이없게도
660년 당나라에 망해버린다.
망한 백제 세력들은 
조몬인들의 섬나라로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한편,
전쟁의 신 급인 김유신을 보유한 신라는 
전쟁 족족 대륙을 휩쓸었다.
신라는 나당 연합으로 
당나라에 식량과 의복을 4년간 제공하며
고구리와 맞선다.

고구리가 신라에 결국 멸망당하는데
원인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의 내분에 있었다.
마지막 고구리의 수도는
지금의 북경(장안성)이었다 한다.

신라는 고구리를 꺾기 위해 
당나라와 연합했지만
허약한 당나라 군의 실상에 실망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당나라 군대는
약한 군대의 대명사가 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당체제는 무너지고
7년간의 나당 전쟁에서 
신라는 당나라에 완승을 한다.

신라는 그만큼 강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통일 신라조차도
대륙과 만주를 다 관리할 수는 없었다.
대륙은 통일 신라, 만주는 대진국(발해),
이렇게 2강 체제에 들어간다.




광개토호태왕비 서체
동방연서회와 여초 김응현 선생

우리 때 대학 입학 시스템은
계열별로 입학해 3학년 때 전공과목을 정하는
계열별 시스템이었다.
동양화를 봐도 통 알 수 없고
인도 사상에 심취해 있던 상황이라
서양화과가 아닌 동양화과를 택했다.

동양화의 기본은 서예인데
대학에서는 서예를 가르치지 않아서
따로 서예 학원을 물색해야 했다.

낙원동에 있는 장안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여초 김응현 선생의 동방연서회를 다녔다.
여초 선생은 당대 서예계에서 유명한
일중 김충현 선생의 동생이었다.
동방연서회는 나중에 알고 나니 
우리나라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은 곳이었다.
서울대 동양화과 이종상 교수와
홍대 동양화과 홍석창 교수를 비롯해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지나 놓고 생각하니 
그때그때 가장 적합한 선생님들이 주어졌으니
나는 평생 선생운이 꽤 좋은 사람이라 하겠다.
수호천사에게 감사한다.

학원의 교육 과정은
연초에는 보름간 서예의 역사 등 강의를 열어 
민족 자긍심을 일깨우는 강의를 했으며
서통이라는 잡지 간행과 교육으로 
다채로운 공부가 되었다.
서예 테크닉과 학문과 이론을 
병행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테크닉컬한 재주를 타고나지 않은
내가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보는 눈 정도는 생겼다는 것이다.



서예는 
전서, 예서, 해서, 초서로 발전해 왔다.
그때 당시 다른 서예 학원은 
주로 해서를 지도하던 시대였는데
동방연서회의 교육은 
전서부터 가르쳐서 기반을 다져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파리에 있을 때,
문화부에서 전시 기획하는 일을 하는 
프랑스 친구와 동방연서회를 맺어주어 
프랑스에서 선생님들과 원로 회원들의 전시를
하게 해 주는 일이 있었다.
생생 내지 않는 보답이었다.




광개토호태왕비 탁본






동방연서회를  다닌 덕택에 
일찍이도 광개토호태왕비를 알게 되었다.
그 고구리비의 서체는 예서체인데
납작한 예서체가 아닌 정방형이고
필선은 예서나 해서의 삐침 같은 것이 없는
담백하고 서예의 정형을 보여주는 
전서의 선이다.

여초 선생의 얘기인즉은,
진나라 때 장성을 토성으로 쌓았다 한다.
동원한 인력이 노예인 동이족이었는데
그들의 글씨체를 노예의 글씨체라 하여 
예서가 되었다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진나라가
글자를 통일하기 위해 만든 체가 전서인데,
노예인 동이족들은 
전서의 다음 단계인 예서체로 이미 글을 쓰고 있다?
누가 더 한문에 있어 앞서 있다는 것인가?"

서체만으로 여초 선생은
한문이 동이족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여초 선생의 가장 뛰어난 공적 중 하나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본질과 닿아있는 
민족 고유의 서체인 광개토호태왕비체를 
되살려 본격적으로 작품화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젊은 시절 광개토호태왕 비문을 직접 탁본해 
서체를 깊이 연구한 여초 선생은
이 서체는 중국에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살아있는 
독창적인 미감의 서체로 높게 평가하였다.

아울러 1천 년 후대에 만들어진 
훈민정음 반포본 서체 필법의 연원을 
광개토대왕비문의 서체에서 찾았다.

여초 선생은 이에 더 나아가 

독창적으로 고쳐 만든 ‘광개토호태왕비체’로 

다수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여초의 전통서예 복원의 노력은 
2003년 인제 구룡동천에서 완성한 대작 
‘광개토대왕 비문’으로 결실을 맺었다.



여초 선생의 광개토호태왕비체로 쓴 작품





여초 선생의 가문은
조선말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 씨의 직계 손이다.
시대가 바뀌어 가는 와중에 
성리학만을 숭상하여 
병자호란을 야기시키고도 
절개로 조선말까지 세도가였던 가문.
여초 선생의 선조들은 그러했으나 
후손은 광개토호태왕비로 
고구리 정신을 고취시켰으니 상쇄가 되려나?
아니라고 본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광개토호태왕비 탁본 작업, 1910년대 후반 촬영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광개토호태왕비


광개토왕비는

414년께 중국 길림(吉林)성

집안(集安)에 세워진 비석이다.

아들인 장수왕(재위 413∼491)이

부친의 능을 조성하면서

높이 6.39m에 이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을 세웠다.

이 비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강건했던 나라의

역사와 품격을 드러낸다.



환단고기를 발표한 계연수 선생이

광개토호태왕비를 찾아간 1898년에는

1,802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비문의 내용 중에

신라의 요청으로 호태왕이 400년에

군사 5만을 동원한 일본 정벌이 있었다.

일제는 그 부분을 쪼아 버린다.

그래서

총 4개 면에 1,775자가 남아 있게 된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제1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전설, 왕위 계승과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술하였고, 
제2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비려와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를 구하고 왜구를 물리쳤으며 
동부여를 정벌한 사실을, 
제3부분에서는 
수묘인 연호(守墓人煙戶)의 내원(來援) 및 
인가 수(人家數)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한중 어느 사서에서도 볼 수 없는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신뢰성 있는 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서예의 근본이란 점에서는
거북의 뱃가죽에 점을 치며 쓴
은나라 갑골문을 들 수 있겠다.
은나리 이전 상나라도 동이족의 나라였으니
한문은 동이족이 만든 글자라는 것을
이제는 중국 학자들도 시인하게 되었다.

대륙에도 수많은 비문들이 있고
훌륭한 글씨체가 있어 왔지만
아무리 비교해 봐도 예술적으로 
호태왕비 이상의 작품이 없다.
광개토호태왕비는
동양 역대 최대의 비석이고
비문은 서예의 정수이다.



역사적 근본이 없는
일본의 열등감은
그들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갖고자 
자신들의 존재를 위해
역사 왜곡을 해왔다.

그들에게는 이 위대한 비의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거대한 비의 비문을 위조하기 위해
석회를 바르고 다시 쪼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하고
문장 자체를 그들 유리한 대로 주장해 왔다.
최초 탁본은
북경대에 소장되어 있고
여러 탁본 중에는
일제 시대 사카와 탁본도 있다.

일본 입장에서 사카와 탁본은 
그동안 일본의 역사왜곡에 근거로 
활용해 온 중요한 자료이다.
이 탁본을 입수한 일본이 주목한 것은
광개토호태왕의 정복 활동을 기록한
신묘년(서기 391년) 부분이다.

"(광개토호태왕이) 391년에 
왜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를
"왜가 391년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그들 입맛대로 
목적어를 주어로 바꿔서 해석하고 
우기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한반도 정벌 내용이
호태왕비의 내용과 일치한다며.

이를 근거로 일본은 
1910년에 한일합방을 비롯한
자신들의 한반도 침략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391년에 이미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 침략은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엄청난 명분의 근거가 
되어 준 것이 바로 사카와 탁본이었다.




광개토호태왕비 탁본, 콜레주 드 프랑스 아시아학회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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