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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22. 2024

한국의 건축과 미술 10  
백제 건축


한국의 건축과 미술 10



백제 건축 

백제 건축을 보려면 일본에 가면 된다.
일본은 가는 곳마다
우리 조상의 삼국시대가
거기에 있으니까.

일본이 가라앉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 조상이 가서 살며 이룬 문화들의 침몰에
가슴 아프기 싫다.



앞으로 나올 백제 왕들의 계보는
25대 무령왕(461~523)
26대 성왕(504~554)
27대 위덕왕(525~598)이다.

일본의 건축사는 이들의 불교 전파와
지원 하에 사찰 공사를 통해
백제 도래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 최초 아스카사(日本最初 飛鳥寺)

백제 성왕은 서기 538년 552년
두 차례 불상과 불사리 그리고 경전 등을
일본 겐메이천황(欽明)에게 보냈다.
비불을 전해 준 백제 성왕은
긴메이천황의 친형이라는 사실이다. 
형의 나라에서 동생의 나라에
불상을 전해 준 것이다. 
이는 백제와 나라 지역의 일본은 사실상
같은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서기 552년 성왕이 보낸 불상은
지금 일본 선광사(善光寺) 본당에
비불(秘佛)로 모셔져 있다.
비불이기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개할 수가 없어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후 백제는
불교 경전을 가르칠 승려들과
불상 제조 기술자, 불화 화공,
사찰 건립 전문가인 조사공,
기와 제작 전문가인 와박사,
탑을 만드는 노반박사 등을 파견했다.
이들은 596년 일본 최초 사찰인
‘아스카(飛鳥)사’ 창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593년 착공하고 불사리를 봉안할 때
천황을 비롯하여 대신들
그리고 백제 승려 등 백여 명이
백제 복식을 하고 기쁨에 차서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서기 606년 금동불상 아스카 대불(大佛)이
마침내 완성된다.
이렇게 해서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들에 의해서
일본 땅에 최초의 절이 섰다.



호키지(法起寺, 법기사) 3중 목탑

호키지는 원래는 오카모토궁이었는데,
쇼토쿠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노오에노가
쇼토쿠 태자의 유언을 받들어 절로 바꾸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높이 약 24m의 3 중탑이 있다.
이곳에는 중요 문화재인 십일면관세음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호키지 3중 목탑




사면에서 보면
탑의 처마가 얼마나 긴 지를 알 수 있다.

호키지 탑의 1, 2, 3 층의 비례가
호류지 탑의 1, 3, 5 층의 비례와 같다고 한다.

층의 비례로 보거나
탑의  처마가 긴 형태도 그렇고
당시 백제에서 온 기술자들이
일본에 거주하며 계속 문화를 일으켰다는
정황으로 보아,
호류지 탑과 호키지 탑을 만든 백제 도편수 팀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호키지 입구






법륭사(호류지) 1

나라에 백제 촌(구다라 가와)이 있었다.
그곳의 천의 이름도 백제천이었다.
호류지는 나라시 남쪽
이카루가(斑鳩) 마을에 있다.

백제계 아소카 시대
백제로부터 불교를 들여와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은
쇼토쿠 태자는 전쟁 전에
이기면 사찰을 짓겠다고 기도한다.
전쟁의 대승을 거두고
백제 27대 위덕왕이 보내준
백제계 불교 건축 기술자들과
백제 양식으로 호류지를 건축한다.

일본사기에 의하면 호류지는
607년 완공됐다가
670년 화재로 전소했다고 한다.
지금 보는 호류지는
711년 무렵 재건된 것이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 장인 중 유중광(柳重光)에게
금강(金剛, 일어로 곤고) 성씨를 하사해서
대대로 유지보수를 부탁했다.
유중광은
금강중광(金剛重光: 곤고 시게미츠)로
개명하고,
'곤고구미'라는 회사를 세우는데,
이후 1400년 유지되다가
2006년에 파산한다.
그러니
재건된 호류지도
본래 호류지와 같을 거라고 본다



법륭사 창건 시기는  607년이라 알려져 있다.
'금당'과 '5중탑' 등이 있는 서원(西院)과
'몽전' 등이 있는 동원(東院)으로 나뉘어 있다.
호류지의 서원가람(西院伽藍)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들 중 하나이다.

중국에도 지진으로
목조 건물들이 남아나질 않았는데
1,400년 동안 온전했던 것이 신기한 일이다.
일본 대기업 한국 지사장을 하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호류지가 있는 나라 지역은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 한다.







호류지 가람 배치





금당과 5중탑





남대문





금당

금당에 있는 벽화는
고구려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승려화가인
담징((579(평원왕 21)∼631(영류왕 14))이
그렸다고 전해지나
체류했다는 기록만 있고
그렸다는 것은 추정일 뿐이다.
담징이 제작을 했다 쳐도
호류지 자체가 670년 전소되었기에
담징의 작품도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의 호류지가 711년 재건되었으니
지금의 금당벽화는
담징 사후 80년 후의 것이고
작자는 미상이다.

담징은 일본에 들어가 한문도 가르치고,
종이, 붓, 먹, 물감, 맷돌 등을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긴 했다 한다.





금당





금당 벽화(부분)






5중탑

호류사의 금당과 탑의 라인과 비례를 보노라면
그저 겸손해지는 나를 본다.
한 인간 도편수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니까.

동시에 목탑도
모서리 처마를 저렇게 길게 뽑을 때,
건물의 몸통이 잘록해 보인다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냐는 것에
초점을 더 맞추어야 할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사천왕상, 금강역사

이 호류지 사찰에는
사천왕상과 금강역사가 분리되어 있어서
두 가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이 금강역사는 다른 금강역사하고는 다르게
오른손 손가락을 쫙 펴고 있다.

일본으로 넘어간 신라의 태견이
데꼬이로 불리거나
이름 없이 부드럽다는 뜻의 '야와라'로 불리며
천왕가의 무술로 전승되어 내려온다.
야와라 기술에서는 손가락을 저렇게 쫙 편다.
이 금강역사 자세로 보아,
그 당시 실제 수련하던 야와라임을 알 수 있다.





호류지 금강역사상






부여 왕궁리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 왕궁리 정림사지 5층석탑





유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우아한 지붕 선과
긴 처마와 짤룩한 몸체
여지없는 백제 장인의 솜씨이다.

호류지 5중탑과 유사한 느낌이다.

몸통이 유독 짤룩해 보이는 것은
지붕을 바치고 있는 공포 부위와
지붕 윗부분을
사선으로 처리해서 이다.

이것이
백제탑 선의 비밀같지 않은 비밀이다.




최근에 익산에서 왕궁터를 발견했다고는 하나
대륙 백제가 아닌 한반도에는
이렇다 할 백제 궁터가 없다.
거대한 익산의 미륵사지탑도
형태로 보아 백제 작품인데 뜸굼없다.

무령왕릉 부지도 임차했다는 기록이
발굴 당시 같이 나왔다.
자기 땅이면 임차를 왜하지?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에는 산동성을 중심으로
무수한 백제 마을들과 성이 아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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