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 놈이었을까?
82년생 김지영 개봉과 동시에 극장 점유율 1위를 내주고 말았지만, 조커는 여전히 사람들 입에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뜨거운 감자다. 조커는 DC 코믹스에서 만든 최초의 단독 빌런 영화로 마블과의 경쟁 구도에서 DC를 구원할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동시에 미국에서는 개봉 전부터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스토리텔링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지만 2019년 황금 사자상을 거머쥐면서 작품성 하나는 제대로 인정받았다. 주인공 아서가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고 극의 흡입력을 높여서 인물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된다는 이슈인데, 글쎄 영화로 인한 모방 범죄 논란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니 잠시 옆으로 밀어 두자.
다크나이트에서 희대의 범죄자로 그려졌던 조커가 이번에 극의 중심이 되어 그만의 서사를 완성하면서, 항상 음지에 가려졌었던 악인들의 스토리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최근 콘텐츠들은 기존의 선한 주인공과 악의 무리 대결 구도에 염증을 느낀 관객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선사한다.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설정하고 끝까지 긴장감 있는 전개를 가져가는 작품 속의 빌런들은 무조건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선배들과는 달리 개연성과 정체성을 부여받고 있는 중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조커에 이입하여 2차 콘텐츠와 드립을 생산하면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기발한 관람객들이 스스로의 찌질한 면모를 내세우며 영화 속 대사와 행동을 소소한 일탈의 개그 소재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2006년부터 방영해서 시즌 8로 완결된 ‘덱스터’ 역시 연쇄살인마를 사냥하는 연쇄 살인자라는 타이틀 속 보통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구현하면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비록 용두사미로 완결되었다는 오명을 남겼지만, 여전히 미국의 최애 연쇄 살인자 (America’s favorite serial killer)로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
'세븐', '파이트 클럽'의 감독, 데이비드 핀처가 연출해서 화제가 된 ‘마인드 헌터’ 역시 흉악범들의 유년 시절과 범죄 동기에 집중한 인터뷰가 극의 중심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현재의 프로파일링 분야를 FBI가 어떻게 정립해나갔는지 다루는 미국 드라마, 마인드헌터. 비교적 담담한 대담의 형태로 그려지기 때문에 관객들이 범죄자들의 이야기에 공감이나 애착을 느끼긴 힘들지만, 개개인의 범죄 행각보다는 그들의 서사에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 에드먼드 켐퍼 등 실존 인물을 재현하면서 어떤 환경이 그들의 심리와 성장 과정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유추하는 재미가 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다 같은 빌런이 된다는 오해는 금물, 프로파일링의 관점에서 수사 중 용의 선상을 좁히는 데에 경향을 분석하는 용도로 유용할 뿐이다!)
국내에도 살인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최종회에 갈아 넣은 드라마, 비밀의 숲이 있다. 2017년에 제작된 웰 메이드 드라마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최근 시즌 2 제작을 확정 지으며 범인보다 더 사이코패스 같은 공감 능력 0 검사 황시목의 귀환을 기다리던 팬들에게 희소식이 되었다. 시청자들의 긴장의 끈을 끝까지 조여온 요인은 계속 변화하는 용의 선상과 의뭉스러운 인물들 뿐 아니라 도대체 범인은 왜 이렇게까지 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호기심이 한몫했다. 진실이 드러나면서 작가는 범인이 ‘큰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 이유에 시간을 할애하며 빌런답지 않은 빌런을 완성했다. 극 중 황시목 검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영웅도 악마도 아닌 ‘시대가 빚어낸 괴물’이었다. (그 괴물이 궁금해졌다면 당신은 이미 비밀의 숲을 정주행 할 준비가 된 몸!)
이미 이분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대중을 설득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다. 사람들은 단조롭고 이해 불가능한 절대 악이 아니라 악이 되어가는, 되어버린 자들의 서사에 관심과 애착을 쏟는다. 절대 불우한 환경이나 배척당한 경험이 범죄를 옹호할 일말의 여지도 남길 수 없지만 전후 사정을 통해 관객들의 극의 이해를 돕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극단적 환경에 노출되어 비틀린 인물상들은 화면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악설에 기인한 캐릭터로는 이미 여러 군상을 경험한 관객들을 쉽게 설득하기 어려워졌다. 시대의 흐름에 안착하지 못하고 소외되고 외면받은 경험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연한 박탈감 속에서 자기 연민 코드는 다수의 공감을 쉽게 얻는다. 조금은 찌질하고 구차해도 내일을 살아내는 이들에겐 조커가 큰 위로가 아니었을까?
매력적인 악인들을 넘어서 극의 개연성에 퀄리티까지 높여주는 사연 있는 빌런들이 온다. 이미 등장한 캐릭터들도 다시 보자.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로 당신을 놀라게 해줄지 DC코믹스의 다음 행보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캐릭터도 다시 봅시다, 새로운 스토리텔링과 또 다른 공감 코드의 등장으로 대박 캐릭터로 거듭날지도 모르니까요. 제2의 곽철용을 발굴하는 자, 흥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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