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탐구 생활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자신만의 취향이 생긴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음악, 싫어하는 모양, 싫어하는 냄새, 싫어하는 부류, 싫어하는 숫자.
어릴 적에는 취향이 명확한 사람들, 호불호가 진한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제비뽑기를 할 때도 난 1번 아니면 안 해, 라는 말을 들으면… 거 참 대충 하지. 라는 마음도 가졌다.
서른이 넘어선 지금, 주변을 둘러보니 본인만의 기준과 취향이 확실한 사람들이 참 멋있다.
물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중립적인 사람도 그만의 취향이지만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으니 나만의 취향, 그리고 나 혼자서 몰두할 수 있는 취미 하나쯤 가져 보고 싶었다.
그렇게 취향독립, 취미탐구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
시작은 도자기 원데이 클래스.
정규 클래스를 듣기 전, 도자기에 내가 잘 스며들 수 있을지 먼저 알고 싶었다.
첫 수업은 핸드빌딩 도자기다.
으레 도자기라고 하면 손과 팔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하겠지만, 핸드빌딩은 그렇지 않다. 미술시간 찰흙 만지기를 생각하면 쉽겠다. 흙 반죽을 길고 동그랗게 말아 그 위에 차근차근 하나씩 쌓아 모양을 점점 잡아가는 것이다.
물론, 물레 수업에 대한 환상도 있었지만 원데이 클래스로 가는 물레 수업은 대부분 선생님의 도움으로 완성한다는 후기를 많이 보았다.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상견례하듯 마주할 이 클래스는 내 손으로 끝까지 완성하고 싶었으니까.
수업 시작 전, 만들고 싶은 작품을 몇 개 생각해오라기에,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비정형 구름 모양의 접시와 커피잔+접시 세트를 대충 그려갔다. 창피하지만, 전형적인 미술에 소질 없는 사람이 그린 스케치…
그리고 대충 비슷한 레퍼런스 이미지도 찾아갔다. 내 그림실력에 선생님이 놀라시면 안되니까…
이렇게 공릉동의 작은 도자기 공방, <훈밤>에서 나의 첫 도자기 수업이 시작됐다.
최대 정원은 4인, 이 날은 운이 좋게도 나 혼자였다. 그리고 훈밤 선생님은 상냥함의 인간화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처음 흙을 만져보는 나에게, 반죽의 기포를 빼는 법, 코일링을 통해 한 단 한 단 쌓아 올리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셨다. 약 2시간의 시간 동안 흙을 만지다 보니, 선생님과 이런저런 대화도 제법 했다.
"제가, 서른이 넘었는데 이렇다할 취미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뭘 하면 좋을지 찾는 중인데 그 첫 번째가 오늘 수업이에요" 라는 말에 선생님은
"생각보다 그런 분들 많으세요,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아이와 함께 오는 부모도 있지만, 무언가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 외에...
도자기는 어느 브랜드가 가장 유명해요? 종교는 뭐예요? 오! 저랑 같네요, 이름이 너무 예뻐요, 저희 둘다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네요. 훈밤은 무슨 뜻이에요? 저는 I 예요, E라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저는 대화하는 걸 좋아해요.
낯선 사람만 보면 대화하고 싶어 미치는 나 때문에 선생님이 피곤해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 가치관, 종교 등 대화 주제가 계속 변하는 만큼 흙이 내 손에 익는 속도로 제법 빨라졌다.
수강생에게 으레 하시는 칭찬이겠지만, 처음 하는 사람치고 손이 빠르다는 칭찬 덕에 도자기와 조금 더 친해졌다.
그리고 신기했던 건,
코일링 하나하나를 올릴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대부분의 것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는 것.
회사 안에서 커리어를 망쳤다며 보냈던 우울한 시간도, 지쳐버린 인간관계도, 사회 현상에 대한 의구심도 이 시간 만큼은 까맣게 잊었다. 눈과 손을 바삐 움직인 만큼 오히려 안도감이 밀려오는 평온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내심 첫 클래스를 기념하여 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흙 투성이 손 덕에 엄두도 못 냈다.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선생님은 테이블 여기저기를 옮기시며 내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셨는데...결과는… 내 새끼 손가락의 자아가 굉장히 쎈 걸로…
이렇게까지 손가락에 힘줘가며 만들었다니 저 손가락만 보면 웃음이 난다.
"입술이 닿는 컵의 입구 두께도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구요."
선생님의 조언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찻잔 입구의 두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지금껏 그저 컵에 따라져 있는 물을 마셔보기만 했지, 입술에 닿는 감촉이 어떨지, 너무 두꺼운지 너무 얇은지 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저도 예전에는 컵 입구의 두께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자기는 컵을 만들 때 입구의 두께도 굉장히 신경 쓴다고, 그 이후부터 저도 마무리 할 때 두께를 신경쓰게 돼요."
어떤 컵의 입구가 두꺼웠는지, 얇았는지 신경도 못 쓰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매일 내 입술에 닿는 컵이 두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인 듯 했다. 프레시한 에이드는 얇게, 막걸리나 숙성을 거친 묵직한 위스키는 두껍게 하는 것이 좋으려나? 일단 만들던 찻잔은 너무 두껍지도 너무 얇지도 않은 두께를 찾아 선생님께 검토를 받고 모양을 완성했다.
정말 다행히도 2시간 내에 계획했던 접시와 찻잔 세트까지 모두 완성했다.
시간이 남아 수저 받침까지 만들었으니까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클래스 마지막에는 도자기에 입혀질 색을 고른다. 2시간의 과정이라 도자기 만들기까지만 진행하고, 이 후에는 선생님의 손으로 완성된다. 초벌과 유색, 그리고 또 한 번 가마에서 구워지는 과정을 거치는 데 거의 4주 정도 걸린다고 한다.
도자기에 색이 입혀졌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 컬러 샘플들을 보고 색상을 골랐다. 생각보다 고민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친구에게 선물할 찻잔 세트는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으로 내가 사용할 접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진한 녹색으로, 그리고 수저받침은 연한 베이지색으로.
음...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 초록색이었구나. 나도 색에 대한 취향이 있었던거구나?
수업을 마무리하고, 선생님이 추천한 공릉동 철길 산책로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려는 해가 내리쬐는 빛을 온 몸으로 느끼며 이제 막 봉오리를 머금고 있는 벚꽃 나무를 보며 지칠 때까지 걸었다. 어쩐지 발걸음이 계속 경쾌했다. 산책이 주는 산뜻함도 있겠지만, 오늘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한 발짝 내 딛었다는 뿌듯함이 컸다.
취미 탐구 생활을 온전히 즐겼던 오늘의 소감? "어쩌면 나 도자기랑 잘 맞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