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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욕탕 Feb 07. 2024

남의 신년인사를 준비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나에게 신년인사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콘텐츠에디터라는 경력을 갖게된 후 글에 대한 별의 별 일을 겪는다.

1년전 입사한 지금의 회사는 에디터 경력으로 이직했으나, 글에 관련된 일은 10% 정도 밖에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이런저런 글과 관련된 긴급한 일은 나의 일로 돌아오곤 한다.

이렇게 돌아오는 일은 사실 부담스럽다.


참으로 부담스럽다. 에디터 출신이면 당연히 글을 잘 쓰겠지, 아이디어가 넘쳐나겠지. 라는 감사한 기대 속에 요청받은 일들은 너무나도 마이너한 심부름 수준이다.


1. 회사 임원의 후배에게 보낼 화환 문구 - 5분만에 주세요

2. 임원의 사내 라디오에서 녹음할 그럴싸한 대본 써주기 - 오늘 안에 주세요

3. CEO 보고용으로 쓰는 프로젝트명 제안하기 (내부 보고용이다.. 외부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4. 보고용에 들어가는 문구 매끄러운 단어 찾아주기 - 지금 당장 주세요


이렇게 5분 안에, 지금 당장, 센스있는 문구를 써달라고는 하는데 나는 생각보다 센스있는 인물이 아니라 늘 부담스럽다. 차라리 자소서를 1시간만에 쓰라고 하면 더 잘 쓸 것 같다.


그러다 몸이 안 좋아 연차를 낸 오늘, 무심하게 메일이 하나 왔다. 사내 임원에게 온 메일이었다.


- 김대리, 우리 회사 입구에 걸 신년인사 2-3줄을 써줬으면 해.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대리니까 이렇게 부탁을 하네. (우리 회사에는 카피라이터가 따로 있고.. 나는 에디터 경력으로 입사 했으나 글에 관련된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애써 무시하며 나중에 생각해야지. 하다가도 오늘까지 해내야해. 라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가는 것이다.


와병 중에 느적느적 몸을 일으켜 여러가지 새해 인사 레퍼런스를 찾아본다.

역시 틀에 박힌 말들 뿐이다. 참고할 만한 라디오 오프닝 멘트들은 너무 감성적이다.


이렇게 남의 신년인사에 마음 졸이며 글을 쓰다가, 찾다가.... 생각했다.

나는 나를 위한 신년인사를 한 적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나는 남들이 하는 버킷리스트도 제대로 짜본 적 없고 신년다짐이나 새해 꼭 이루고 싶은 소망도 가져본 적 없다. 그만큼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본적도 없다. 새해인사라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올해는 꼭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자!" 이런 뻔한 말들이나 해왔을뿐..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신년인사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허탈했다.


그래서 마음 먹었다.

내 이름으로 올라가지도 않을 남의 신년인사를 쓰기 전에, 나를 위한 신년인사를 써보자고.


[목욕탕의 2023년]

나이 좀 먹은 나에게는 미래도시에나 나오는 숫자인 줄만 알았던 2023년을 맞이 했습니다.

그닥 치열하게 산 것 같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낸 적도 없고 행복한 기억도 딱히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12개월은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흘려가고 말았습니다.

한 달 한 달 지나갈 때마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냐며 아쉬운 소리도 해봤지만,

그렇다고 아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한 새로운 무언가도 하지 않고 허망하게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쁜짓 안 하고 살았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것도 같습니다.)


근데 23년은 좀 다르게 보내고 싶습니다. 어떤 목표를 세울 수도 있고 다른 목적지를 가기위한 준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새해에 이룰 수 없는 것이라도 다짐을 하는 건, 그래도 좀 더 나아지는 나, 나아지는 날을 기대하는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지난 1년을 돌아보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저 시간을 날렸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 아쉬운 순간을 기억해보려고 합니다.

그때 이렇게 해봤으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좀 더 용기를 내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 아쉬운의 순간을 저는 2023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으로 이동시키려고 합니다.  


내가 맞을 새로운 시간에 좀 더 나아지는 나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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