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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oist Nov 24. 2019

죽음이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

<제8요일>, 자코 반 도마엘 (1996)


오늘은 <제8요일>을 이야기합니다.


이 작품은 삶으로 죽음이 따뜻하게 걸어 들어오는 과정을 그립니다. 혹은 삶과 죽음이 화해하는 현장을 바라봅니다.


조지가, 죽음이 내게 뛰어들다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두 남자가 급작스러운 기회에 서로의 인생에 끼어들면서, 삶과 죽음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세일즈 기법을 전수하는 강사 아리는 늘 고객 응대 시 눈을 마주할 것, 웃을 것, 성공한 인상을 줄 것, 열정적일 것이라는 4가지 원칙을 교육자들에게 주입시킵니다. 하지만 그의 실생활은 사실 외면과 태만의 연속입니다. 별거 상태의 가족과는 가끔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약속도 이행하지 못해 공동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될 위기에 처합니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습니다.


한편 조지는 다운증후군 환자들이 모여 지내는 요양원에서 생활합니다. 조지는 어느 날 돌연 짐을 챙겨 엄마를 찾아 나섭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목적지도 없습니다.


아리와 조지가 만나는 찰나, 기이하게도 죽음이 뛰어듭니다. 아리는 아내의 집에 지내고 있는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모든 것을 잃었음을 감지하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리곤 운전 중 핸들을 놓는 것으로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려고 합니다. 아리에게 이 순간은 삶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대치 문제로 다가왔을 겁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도로로 뛰어든 개를 치며 아리는 급정거를 하고 살게 됩니다. 마침 조지와 동행하던 중 사고를 당한 개. 아리는 수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을 떠안고 조지와 한 길을 떠나게 됩니다.


잃어버린 아리를 찾아서


조지는 시종 종잡을 수 없습니다. 아리는 조지를 감당하기 힘들어 엄마를 찾아주고 얼른 여정을 끝내고 싶지만 실은 조지의 엄마가 4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새 길에 오릅니다.


왠지 조지는 그 소식에도 덤덤하기만 합니다. 깜빡한 사실을 다시 되새겼을 뿐이라는 듯 티 없이 맑은 얼굴을 뽐내기만 합니다. 매일 같이 언제 어디서든 엄마의 환영을 보는 그에겐 어쩌면 그저 웃어넘기는 일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내내 조지는 죽음 앞에 의연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할까요.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조지는 분명 이상한 힘을 가졌습니다. 생동감을 선사합니다. 아리는 그 기운에 어느새 젖어듭니다. 무미건조했던 아리의 얼굴엔 웃음이 물듭니다. 또 전에는 마주할 수 없던 나무, 풀, 무당벌레, 자연의 ‘살아있음’에 동화됩니다. 그리고 조지와 함께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우리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깁니다. 관객의 마음에도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는 1분이라는 디제시스적 시간.


그럴수록 아리에게 삶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생기가 돕니다. 언제나 딸의 생일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부끄러운 아버지에 불과했던 아리는 조지의 도움을 받아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진 경험을 선사해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합니다.


화살표, 죽음을 향한 삶의 일방성


아리를 변화시키는 조지가 죽음의 현현이라는 뛰어난 묘사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언제나 조지는 일방으로 그려진 화살표를 좇아 휘파람을 휘익 불고 나아갑니다. 그가 갈 길을 잃는 순간은 무방향성과 마주할 때입니다. 조지 엄마의 죽음을 확인하고 동행하는 것에 지친 아리가 홧김에 조지를 버려둔 곳은 화살표 없는 사거리입니다. 조지는 우두커니 서서 비에 젖을 뿐입니다. 일방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속성을 잃어버린 ‘삶이자 죽음’은 나아갈 방향이 없어 그 의미를 소실한다고 해석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을 깜빡이는 것, 숨을 쉬는 것, 어느 하나도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 놓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되돌림도, 멈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조지가 따르는 화살표와 죽음을 향한 삶의 일방성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됩니다.


더불어 조지의 아리송한 정체가 보다 직접적으로 그려지는 장면도 있습니다. 긴 여정에 지친 아리와 조지가 휴식을 취하는 공간에서 조지는 잠결에 엄마의 환영과 대화를 나눕니다. 엄마는 조지에게 그가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는 천사임을, 조지의 세상은 현실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싱싱한 죽음이 생을 부른다


결국 삶이 곧 죽음인 달콤한 탈골 여행은 조지의 마지막 선택으로 완전한 그림을 완성합니다. 아리를 위해 소임을 다한 조지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기피해야만 했던, 그럼에도 무엇보다 갈구했던 초콜릿을 입에 털어 넣으며 건물 옥상에서 ‘땅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조지가 죽음이 되고 죽음이 조지가 됩니다.


이어지는 아리의 독백은 오프닝과 정확히 겹칩니다. 아무것도 없는 태초에 신이 태양을, 바다를, 레코드를, 텔레비전을, 풀을,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세기 신화를 읊습니다. 조지, 즉 죽음을 이해한 아리는 이제 탄생을 목도할 줄 알고 바다와 바람과 풀을 느낍니다. 바다는 발을 적시고 바람이 간지럼을 태우고 풀이 울면 쓰다듬어 줍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 신이 조지를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태초탄생이 따스한 죽음을 끌어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8요일>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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