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데리고 글쓰기
글 좀 잘 써보고 싶은 중년 주부의 눈물 콧물 분투기 12
남편과 나는 아주 다르다. 강아지가 주인 뒷발 졸래졸래 쫓아다니듯 남편을 ‘ㅇㅇ형’이라고 부르며 동기들과 소주 한잔 얻어먹으러 우르르 따라다니던 일이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결혼식을 특이하게 하자고 했고 남편은 결혼식이라는 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 했다. 양가 어른들이 선호하는 동네에서 자랑하기 딱 좋은 예식장을 잡았다. 나는 신혼여행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하자고 했다. 남편은 직장과 사회생활만으로도 모험은 충분하니 신혼여행만큼은 경치 좋고 날씨 화창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 먹으며 편하게 쉬다 오자고 했다. 그래서 하와이로 갔다. 그야말로 편하게 쉬고 왔다. 이른 기상에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있는 나와 달리 남편은 새벽에 눈을 떠도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우는 아침형 인간이다. 저녁 어스름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온몸의 감각 촉수가 돋아나 세상의 희로애락을 감지해 울고 짜고 웃고 화내는 나는 틀림없는 저녁형 인간. 밥이 없으면 빵이든 과자든 있는 거 대충 집어먹으면 그만인 나와는 달리 고깃집 갈비와 냉면 후식으로도 집에 오면 ‘어, 좀 출출한데’라며 탄수화물이 위로 좀 들어가 줘야 하는 게 남편. 대낮 맥주 두어 잔쯤이야 음료수로 취급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낮에 마시는 맥주는 ‘낮술에 취하면….’에 나오는 그 낮술. 갈등 발생 시 상황과 감정을 적절하게 섞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온몸으로 이해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나와 달리, 남편은 과학적 인과성과 수학적 논리성을 따져 경험치에 의해 경중을 따져 해결책을 모색한다. 한마디로 이과형 남편과 문과형 나.
그런데 이렇게 참으로 ‘안 맞는’ 서로가 어떻게 20년을 넘게 슬기로운 결혼생활을 하는 걸까. 답은 하나, 주말부부. 그렇다. 주말부부인지 20년은 족히 되었다. 결혼하고 고작해야 2, 3년 함께 살았을까? 평일 내내 내 마음대로 하다가 주말 이틀 동안만 열심히 살면 된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읽고 싶으면 읽고 쓰고 싶으면 쓰고 글감을 핑계로 멍 때리고 싶으면 멍 때리고. 그렇게 평일을 지내다 주말에만 이른 아침에 기상하고 삼시 세끼 차려내고 신발 한 짝도 신기 싫어하지만 산책도 하고 커피는 책을 읽으면서가 아니라 남편과 이야기하면서 마시면 된다. 할만하다. 이틀이니까.
그런데 비상사태 발생! 열흘 전 즈음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했다. 이로써 나에게도 비상사태 발생. 남편 재택근무 4일 차다. 주말용 아내가 평일용으로 범위 확대됨으로써 나의 모든 은밀한 사생활을(?) 한 주 미뤄야 한다.
다른 건 괜찮다. 딱 하나, 글을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평소에 내가 글 쓰는 습관은 좀 멋대로다. 딱히 시간을 정해놓지도 않고 한 번에 몰입해 일을 끝내지도 못한다. 일단 노트북을 소파 탁자에 펴놓고 하루를 시작한다. 두어줄 쓰다가 막히면 메일도 확인하고, 다른 SNS도 들락거린다. 그러다 또 한 줄 쓰고, 막히면 화장실도 갔다가 물도 마신다. 그리고 또 한 줄. 생각이 멈추면 아예 책을 집어 든다. 그대로 안방 침대로 직행해서 반쯤 누워 한두 시간 책을 읽는다. 마음 내키면 낮잠도 한숨 잔다. 그러다 아쉬우면 다시 노트북을 켜고 (그때까지도 노트북 자리는 고정) 몇 줄 쓴다. 이러다 보니 글 한 편 쓰려면 온종일 걸린다. 머릿속에는 글 생각이 떠나지 않지만 몸은 자유롭게 집안 곳곳을 누빈다고나 할까. (산만한 내 아이는 틀림없이 내가 낳은 아이)
이런 게으르고 자유롭고 시간 죽죽 늘어지는 글쓰기 습관이 몸에 배다 보니 남편이 집에 있을 땐 엄두를 못 낸다. 뭘 해도 나 혼자 하던 일상에서 뭘 해도 남편을 데리고 해야 하는 일상이다. 남편의 은퇴가 멀지 않았으므로 사실 언젠가부터 남편을 데리고 글 쓰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과 이야기를 했다. 집 앞 가게를 가더라도 나를 데리고 심지어 강아지까지 꼭 데리고 가야 하는 남편에게 하루 중 대여섯 시간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노라고 선언했다. 나는 남편이 원하는 수영강습에 동반하기로 했고 남편은 온종일 틀던 텔레비전을 끄기로 했다. 노부부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행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은 남편의 장밋빛 그림. 나한테는 선택지에도 없는 장면이지만, 과감히 함께 그려주기로 하되, 아침 늦잠을 허락(?) 받았다. 단 일단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준 뒤 다시 잔다는 조건, 이런 젠장. 어쨌거나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의 합일점을 찾아 우리 둘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잘될까. 선행학습처럼 재택근무라는 연습용 시간이 주어졌지만 나흘 동안 나는 글도 책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남편은 그야말로 재택 ‘근무’를 해야 하니 나를 방해할 리가 없다. 오히려 내가 일하는 남편을 방해하고 있으니. 남편이 집에 있으면 주말부부 세포가 살아나 몸이 반응하는가 보다. 오랫동안 주말부부의 리듬으로 살아온 내가 남편과 함께 있는 날은 평일 리듬으로 살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각자도생 하며 살아온 참으로 ‘안 맞는’ 사람 둘이 ‘잘 맞는’ 사이로 바꾸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 존중 따위는 없다. 싫은 건 싫은 거다. 단지 참을 뿐이다. 나는 남편이 하지 말라는 일을 기어코 하고야 만다. 그래도 남편은 참는다. 남편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같이하자고 끝까지 고집하다. 그럼 나는 억지로라도 한다. 서로 못마땅해하는 자잘한 차이는 적당히 무시하거나 참는 무던함이 지금껏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인가 보다. 아니, 어쩌면 주말부부이기에 가능했을지도.
어쨌거나 남편의 은퇴 후에 남편을 데리고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 이렇게 선행학습을 망쳤으니, 제대로 진도가 나갈 때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지.
그런데 이 글? 오늘 점심때 즈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급히 남편이 가봐야 했다, 으하하.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소파 탁자 위에 놓고, 왔다 갔다 하며, 한국 대 뉴질랜드 올림픽 축구도 한 30분 보고, SNS도 들락거리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남편은 내일 오전에 오겠다고 한다. 나는 오늘 ‘슬기로운 의사 생활’ 보면서 맥주도 한잔할 것이다. 남편은 ‘극혐’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혼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