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 (1)

스물여덟

by Lizy

싱가포르에 막 도착한 저는 새로운 친구들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여러 사람과 가볍게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특별히 연애를 시작할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T는 제가 좋아하던 몇 가지를 더 갖추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해 금융권에 있던 것. 뭐 그런 현실적인 부분들이요.

다만 체격이 좋고 운동을 즐긴다길래, 활발한 성격일 거라 짐작했어요.

그건 당시 제가 찾던 이상형과는 조금 달랐죠.


그런데 우연한 대화 중, 그가 자신이 INFJ라고 말했어요. 시원시원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집돌이에 생각이 많은 편이라며, 그런 내향적이면서도 깊이를 지닌 모습이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ENTP인데, ENTP와 INFJ의 궁합이 좋다는 말을많이 들어왔거든요.

즉흥적이고 호기심 많지만 때로는 충동적이고 서툰

ENTP인 저를 INFJ가 잘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반대로 ENTP는 INFJ에게 새로운 에너지와 자극을 준다고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확장시키는 관계라니까,

그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바로 다음날, 제가 오피스 쪽으로 갈 테니 점심 먹자고 먼저 제안했습니다.

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대로 그가 제 마음속에 들어오는 기분이었어요.

진중해 보이는 인상에 균형 잡힌 체형,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이 마음에 들었어요.

서로 마스크 벗은 건 처음이었는데, 그가 저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더라고요.

거기서 ‘이 사람도 내가 마음에 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식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생각이 많아졌어요.

오늘 손톱이 너무 길진 않았나, 하는 사소한 걱정부터..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또 사랑에 빠졌구나.

그 주만 해도 새로운 친구들을 수없이 만났는데,

이렇게까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당시엔 식당 안에서 식사하기가 어려운 시기였고,

자연스럽게 주말에 그의 새로운 집에 놀러 가기로 했습니다. 싱가포르 생활 2년 차였던 T는 새롭게 환경을 바꿔보고 싶다며

원래 살던 센트럴을 떠나 Katong으로 이사했다고 했어요. 물론 저에게는 처음 가보는 동네였습니다.

Katong은 싱가포르의 가로수길 혹은 브룩클린 같은 곳이었어요. 낮은 건물들과 감성적인 카페들이 이어져 있어, 금세 저도 이 동네가 좋아졌습니다.


예쁜 브런치 가게가 많았지만 식당 안에서 먹을 수는 없었고, 근처에서 포장해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 만남에 집으로 초대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땐 코로나 규제로 어쩔 수가 없기도 했고

처음 온 이 나라에서의 모든 게 그냥 설레고 즐겁게만 느껴졌어요.


창밖이 내려다보이는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했어요.

첫 만남에선 조금 차갑게 느껴졌던 T의 모습이,

사실은 낯가림 때문이었는지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의 집은 꼼꼼한 성격답게 깔끔했고, 좋아하는 음악과 옷들이 정돈된 공간 속에 그의 취향이 보였어요.

문득 그가 쓰던 향수가 생각나요.

싱가포르의 덥고 습한 날씨에는 조금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우디 한 르라보의 상탈.

평소에도 우디 한 남자 향수를 좋아하던 저였고

T에게 그 향이 유난히 잘 어울렸어요.


서로가 마음에 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지만

사실 겨우 싱가포르에서 2주 격리 후 첫 주말이었어요.그게 조금은 문제였죠.

한국에 있던 친구들은,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벌써 연애를 하냐며 저를 타박했어요.

사실 저도 처음엔 연애를 바로 시작할 생각이 없었어서 잠시 망설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미 28년을 그렇게 살아왔는걸요..

이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라면 시작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그의 취향은 저보다 훨씬 섬세했지만,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각자 혼자 살고 있었기에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기에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 점 덕분에 우리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특히 건강한 몸과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잘 맞았습니다.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챙기며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모습이 비슷했어요.

주중에는 각자 만든 요리 사진을 공유했고,

아침에는 통화하며 러닝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늘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고, 내가 잘하고 있다며 북돋아준 T가 아니었다면,

독립도, 해외 생활도 처음이었던 제가 이렇게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함께 보내는 주말은 늘 좋았어요.

아침엔 일어나 건강한 식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커피를 좋아하던 그와 함께 근처 카페에 가곤 했어요.
각자 일하거나 글쓰기,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불필요하게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는 대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이 좋았어요.

그런 모습이 닮고 싶기도 했고요.

그러다 저녁이면 바닷가를 따라 산책하고, 집에 돌아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어요.

싱가포르 생활 2년 차였던 T는 이곳이 처음인 제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연애도 처음이라 모든 게 새로웠고,
혼자 살아보는 것도 처음이다 보니 연인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시간들이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20대 후반이었고, (공식적) 다섯 번째 남자친구였으니 연애 경험이 없지는 않았어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왔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제 감정까지 섬세하게 헤아려주고 제 마음을 들어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상대를 볼 때 능력을 중시하던 제 기준 때문인지, 주로 이성적인 사람들을 만나왔어요.

그래서인지, 때로는 대화가 완전히 통한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감수성이 필요한 대화에서는 늘 답답함을 느끼곤 했어요.


그런데 T는 현실 감각이 있는 반면 감성도 풍부해서,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식사를 마친 후 마주 앉아 끝없이 대화를 나눴어요.

그 시간이 계기가 되어,

앞으로 누군가와 결혼을 생각한다면

내게는 이런 대화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혼한 친구들은 살다 보면 생각보다

대화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런 깊은 연결감을 주는 건 결국 진실한 대화였어요.

이런 연결이 없다면 어떤 관계도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INFJ 특유의 배려심이 있는 T였기에,

며칠 동안 한 공간을 함께해도 불편함이 없었어요.

위생관념이 비슷했던 것도 한몫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와의 관계에서 꽤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만약 내가 누군가와 공간, 더 나아가 삶을 함께 한다면

어떤 파트너가 나에게 맞을지, 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 요리도, 청소도 해본 적 없던 제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결혼을 했다면, 분명 어려움이 많았을 거예요.


이전 연애에서도 매번 결혼을 생각해 보긴 했지만,

결혼이라는 화두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건 이 연애가 처음이었어요.

아마도 처음으로 독립해 생활을 시작한 시점이었기 때문이겠죠. 실제로 함께 살며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싱가포르에서 보기도 했고요.

주중에는 각자 일을 하느라 바빴지만, 주말에는 넷플릭스를 보고 와인 한 잔 나누며 대화를 하고 함께 장을 보고, 요리하고, 산책하는 이런 일상들.

제게는 자연스럽게 미래를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싱가포르에서의 평화로운 시간을 반년 정도 함께 보내다 보니,

다시 머릿속에 결혼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더 커졌어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열망보다는, 서로가 같은 속도로 이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받고 싶었어요.

제게 결혼이란 남은 삶을 이 사람과 함께 보내겠다는 스스로와 서로의 약속이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에게 이런 확신을 줬으면 하는 마음이요.

나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망설임 없이 말해주는 사람이길 바랐어요.


2022년 마리나베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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