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연애 (2)

스물일곱

by Lizy

그와 만난 지 8개월쯤 되었을 무렵,

우리 사이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웃고 장난치는 시간은 길었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기 전엔 며칠을 고민해야 했어요.


인정하는 건 슬프고 힘들었지만,

현실을 마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분명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지만,

그가 저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느낌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스물일곱, 주변엔 이미 결혼한 친구들이 생겼어요.

이른 나이지만 저는 서로만 준비돼 있다면 못할 건 없다고 믿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그쯤에 결혼을 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 사람도, 제 눈엔 여러모로 안정돼 보였어요.

그럼에도 그는 어떤 확신도 주지 않았고,

그럴수록 제 안의 서운함과 답답함이 커졌습니다.


매일을 웃고 떠드는 건 잘했어요.

하지만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사이란 게,

제게는 점점 의미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20대 후반, 1년도 안 된 사이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먼저 한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놨어요.


'나는 지금까지 네 번의 연애를 통해
많은 감정을 느껴봤고, 다양한 경험도 해봤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제는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자리 잡고 싶어.
더는 헤어짐을 겪고 싶지 않고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면
시간을 낭비하거나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아.'


가만히 듣던 친구가 제게 준 솔루션은 간단했어요.

“일단 네가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해.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다를 수도 있고,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서, 그걸 말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너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어.”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게
쿨하지 못하고, 너무 아쉬운 사람처럼 보일까 망설이던 저에게 필요한 말이었어요.

그래, 헤어짐이 슬플지언정
내 좋은 시절을 낭비하는 것보단 나으리.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3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싶고,
더 이상 장기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고.
우리가 인연이 아니라면, 각자의 인연이 따로 있을 거라고 말하기로요.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디까지인지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죠.


쉬운 이별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무서운 일은 없었어요. 회식이 끝난 날, 만취한 그는
자신이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울먹이며 말했어요.

그땐 마음 아픈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려둔 그림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그는 부모님께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을 거예요.
어쩌면, 우리가 만난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항상 당당하고자 하고 사랑받았던
20대 초반의 연애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며 현실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이미 한두 줄로 설명되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생각에 잠겼어요.


그 후로 만난 남자들은
늘 비슷한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었어요.
타이밍일 수도, 조건일 수도,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는 벽.


J는, 저를 만나기 전 싱가포르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어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였지만, 막연히 동경하고 있던 저에게 그 사실은 은근한 가산점이 되었죠.

그러다 어느 날, J가 무심히 던진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박혔어요.


“싱가포르에서 일하던 내 여사친들 중, 거길 안 좋아하던 애가 없었어.”

나도 그 나라를 좋아하는데.
그곳에서 일하고, 결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연애도 그렇지만,

뭐든 꽂히면 바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저는

그렇게 싱가포르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이별하진 않았지만,
가능성 없는 관계에 더는 매달리고 싶지 않았어요.


스스로를 실속 있고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규정되는 나 말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 믿었어요.


싱가포르에 취업을 했고 그와는 헤어졌습니다.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은 잊지 못할 거예요.

모든 게 설레고 좋았습니다.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할 땐 조금 슬펐지만,
면세점에 들어서자마자 다음 데이트에 뭘 입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결혼할 사람을 만나기 전엔 절대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리. 나는 잘 살 거라고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죠.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상하게

반갑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어요.

줄지어 선 야자수들도, 쏟아지는 태양빛마저
저를 환영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에필로그에서
제 모든 선택에는 늘 사랑이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때 그 소개팅으로 J를 만나지 않았다면,
결혼 이야기를 꺼낸 후 헤어지지 않았다면—


용기 내어 꺼낸 결혼 이야기 직후,
그와 헤어졌던 그 당시에는
내가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인생에는 멋진 길들이 있고,
수많은 엇갈림의 끝은 결국 그 길을 향하고 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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