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안읽씹으로 끝난 연애 이후, 긴 공백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유에 감사하며 즐길텐데, 당시엔 이제 내가 연애의 감을 완전히 잃었구나 했습니다.
한국에서 연애의 시작이라 하면, 아마도 가장 흔한 건 소개팅일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20대 후반까지 단 한 번도 소개팅을 해본 적 없었어요.
운명은 찾아온다고 믿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언니에게 카톡이 왔어요.
‘요즘 뭐 해? 만나는 사람은 있어?’
연애가 안되어 쉬는 중이라 했더니, 네 나이는 그럴 때가 아니라며 소개팅을 해주겠다 했어요.
거절했는데도, 밥이나 먹어보라며 결국 연락처를 전해받았어요. 카톡 프사를 봤는데 크게 기억에 남을 법한 외모는 아니었어요. 서성한 중 한 곳을 졸업했고, 투자은행에 다닌다고 했어요. 나이는 저보다 두 살 많았고요.
큰 기대 없이, 저희 동네 선술집에서 보기로 했어요.
저는 일찍 근처 카페로 가서 논문 준비를 하며 그의 퇴근을 기다렸어요.
가볍게 맥주 한잔 정도 생각했어요.
제가 가게를 못 찾아서 헤매자, 가게 밖으로 나와 있던 그를 봤습니다.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는데 키가 크고 슬림하고 머리통이 작았고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타일과 핏이 좋았어요.
네, 마음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나간 자리였는데, 왠지 모르게 재밌어질 것 같았어요. 무슨 이야기를 그리 했는지 모르겠지만 가게 마감까지 대화를 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전화를 붙잡고 새벽까지 깔깔거리며 통화를 했습니다.
다음 날 제가 친구들과 여행이 예정되었다는 걸 잊고 너무 과음을 해버렸어요. 숙취에 힘들던 아침, 그가 데려다주겠다며 우리 동네로 왔습니다.
여행 내내 술 한 방울 못 마시는 저를 보고 친구들은 짜증을 내면서 웃었어요.
소개팅에 만취를 한 게 너무 저답다고 했어요.
'넌 일단 마음에 들면 그냥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이잖아.' 다이나믹듀오의 노래 가사 중 하난데 정말 저는 그랬어요.
그러고 한두 번쯤 더 만났을까요? 연희동에서 데이트를 했는데 제가 가보고 싶던 흑백사진관이 있었어요.
사진을 함께 찍자고 제안했고 그는 예쁜 꽃다발을 준비해 왔습니다.
하얀 셔츠와 셔츠 원피스까지 맞춰 입은 저희를 보고
작가님이 물으셨어요.
'무슨 기념일이세요?', 제가 "이제 만나보려고요!"라고 답하자 사귀기 전에 사진을 찍으러 온 커플은 처음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항상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그런 게 없었어요.
사실 이유는 알아요. 그의 조건도, 우리의 시작도 비교적 무난하다고 느꼈거든요.
특별히 로맨틱하지도, 운명의 상대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꽤 나다운 연애를 했습니다.
긴 공백이 무색하게, 자연스럽게 시작된 네 번째 연애였습니다. 둘 다 밝고 장난기가 많아 여러모로 유머코드가 잘 맞았어요.
웃을 일이 많아서 그게 가장 좋았어요.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녀서 공감대도 많았습니다.
그땐 제가 27, 그는 29.
마침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어요. ‘결혼할 인연은 모든 게 자연스럽다’는 옛말처럼,이렇게 소개팅으로 만나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게 그런 건가 싶었어요.
이효리가 말했던 ‘그놈이 그놈이다’는 말도 자꾸 맴돌았고요. 그땐 그랬어요. 평범한 그런 연애의 끝이, 결혼일 거라고. 내 연애도 결혼도 그리할 거라고.
그의 회사가 저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였고,
집도 20여분 거리. 평일 퇴근하고도 만나고
주말엔 당연히 만났습니다.
식도락을 즐기던 사람이라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는 재미가 있었어요.
전 연애에서는 함께 술을 마신적이 별로 없거든요.
술로 시작된 연애라 그런지 반주를 종종 했어요.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땐, 한라산을 마시고 밤새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놀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전 회피형과의 연애, 그 끝에서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까먹고 말았어요.
그런데 J와의 관계를 통해,
저는 자연스럽게 저를 찾게 되었어요.
이유도 모르던 이별에 매여 있던 제 마음이, 어느 순간 편해져 고마웠습니다.
물론, 이 연애에도 아쉬운 점들이 있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