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2)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

by Lizy

헤어짐은 정말 갑작스러웠습니다.

이직을 할 때, MBA를 준비할 때도 예민했던 L이지만

우리 사이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하루아침에 그는 이별을 고했어요.

그것도 카톡으로요.

그리고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우리인데

얼굴이라도 보고 마무리하자는 제게

이틀뒤 온 미안하다는 답장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납득할만한 이유를 주지 않으니

마음을 정리하는 게 정말 어려웠습니다.

꽉 막힌 듯 답답한 마음에 서점으로 가

애착과 이별에 관한 책만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 회피형.. 회피형 남자였어요.

문제가 있으면 당장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저와

그냥 회피하고 말던 그 사이에 있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1년도 넘게 만났을 때,

그가 제게 몇 가지를 요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제가 자신을 "야"라고 부르는 걸 얘기하며

한 번이라도 본인이 저를 야라고 부른 적 있느냐고,

어린아이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본인을 알지 않냐고 물었죠.

근데 그런 제가 본인을 야라고 부르는 게 싫다고 했어요. 생각해 보니 4살 어린 제게도 존댓말을 섞던 사람이었어요. 당황스러운 맘에 "처음부터 알았다면 나도 조심했을 텐데 왜 이제와 나를 잘못한 사람처럼 느끼게 하냐고" 따졌습니다. 그는 꼭 이야기하지 않아도

제가 알아주기를 바랐다고 했습니다.


매우 섬세한 남자 그리고 눈치 없는 여자.

그토록 서로를 힘들게 하는 조합이라는 걸

그때까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집에 제가 자주 갔었으니 아마 더 불편할 일이 많았을 거예요.

지금이라면 제가 더 주의할 텐데

그땐 연인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개인공간을 중시하고 경계가 필요하던 그에게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많이 다르고, 그래서 지쳤을 거라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그렇지만 친절까진 못해도

조금은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이런저런 말 없이 20개월의 연애를 카톡으로 끝내는 그에게 정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카톡을 보고 놀란 제가 전화를 걸고,

그는 끝내 받지 않고 신호음만 울리던 날.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손에 땀이 나요.

운전대를 잡지 못해 차를 세워야 했던 날요.


아무런 이유를 모르니 간접적으로 라도

이별을 이해 보려고 했어요.

설명이 되지 않으면 절대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저인데,

그렇다고 모든 일의 이유를 알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회피형 연애의 특징을 검색해 보고,

애착에 관한 책도 읽었습니다.

내가 사소하게 느꼈던 것들이 그를 점점 멀어지게 했구나 짐작해 봤어요.


주변 비슷한 성향의 친구에게 제 연애를 상담하기도 했어요. 그 사람을 만나기 전 내 마음은 평평하고 잘 닦인 도로 같았는데

그와의 기억 때문에 한구석이 구겨진 거 같다고 그를 원망했던 저. 구겨진 구석이

너를 더 매력 있고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던 친구. 엄마에게 말을 하다가, 결국 눈물이 났습니다.

다정하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이별을 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계기로 삼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회피형 애착을 탐구하는 건 그만두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부드럽고 다정한 연인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거칠고 정제되지 않았던 제 모습을

당연히 받아들여주리라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땐 꼭 말하지 않아도 주변을 읽고 배려하는 게 사랑임을 몰랐습니다.

어릴 적 주양육자와의 경험에서 애착유형이 형성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입장이 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되었고요.

흑역사라고 부를 수도 있고, 지금도 정이 가지는 않지만. 그때의 경험 덕분에 저는 조금 더 다듬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잠수이별은 제가 경험한 최악의 이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이별이기도 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묻어두었던 그와의 연애를

이제는 마음속에서 조금 더 가볍게 꺼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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