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1)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

by Lizy

"이른 성공은 인생의 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그런 성과를 내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20대 중반의 연애가 그랬습니다.

따뜻함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 나머지는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L을 만난 것도 마침 겨울이었습니다.

대학원 과제를 하려고 잠시 들른, 압구정의 한 카페였어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얗고 단정한 외모 때문도 있지만

책에 집중하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쩐지 가만히 있으면 후회할 것 같아,

따듯한 차에 제 번호를 적어

카페를 나서는 그에게 건네기로 했어요.

지금이라면 못했을 일인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던 나이였어요.

저에게 밥을 사고 싶다는 연락이 곧바로 왔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혹시 몰라,

친구에게 "연락 안 되면 좀 살펴봐줘" 하고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게 정말 섬세하고 과하게 조심스러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만을 추구했고 그게 제 성격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명과 제 촉을 믿었었죠.

그 역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포라 영어를 잘했고, 미국에서 학부를 나온 것도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달랐던점 이라면, 그가 유독 내향적인 성격이었고

제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연상이었다는 것.

고양이를 기른다는 말에

언젠가 고양이를 보러 가겠다고 했었지만,

실은 그의 취향이 담긴 공간이 더 궁금했어요.


자취를 하는 사람의 집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는 그런 데이트를 주로 했어요.

고양이와 놀고, 동네에서 브런치를 먹고.

가끔 강남역까지 걸어갔습니다.

에너지가 안으로 깊이 향하던 그는, 자극이 많으면 쉽게 지쳐했어요.

그래서 누굴 함께 만나거나, 어딘가로 바람을 쐬러 가는 일은 많지 않았죠


그렇지만 내성적이고 자기 방어가 강한 그 사람이

저에게만은 경계를 내려놓고 해사하게 웃는 모습.

제게 존댓말을 하던 차분하고 다정한 말투.

잊은 줄 알았던 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전에는 자존심만 부리던 저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어요.


제가 그 집에 자주 놀러 가니,

친한 친구들이 디퓨저를 선물하며 그 집에 두라고 했어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준 물건을 집에 두기 싫다고 거절하던 L.

어딘가 날카롭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게는 마음을 열어주었으니

그 마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친구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던 저에게,

“그런 식으로 너를 이용하려는 친구라면, 나는 별로야”라고 말하던 기억. 나와 남의 경계가 정말 확실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외향적이던 제가 처음으로 내향적인 연인을 만나

그의 안으로 흐르는 에너지를 볼 수 있었던 기억은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1년 8개월 정도를 만났습니다.

저에겐 가장 짧은 연애였지만

그 사람에게는 가장 긴 연애라고 했어요.

한국에 지인이 없고, 혼자 살던 L이라

주말 대부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연애에 비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남아있는 기록도 모두 정리했고요.


이전 연애들이랑은 다르게 부딪히는 일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일도 있었어요.

그는 스물아홉의 직장인이었고

그래서인지 외부적 요인이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를 만날 때 내가 행복했나 물으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좋았으니까 내 성격에 1년 8개월이나 만났겠지라고 유추할 뿐입니다.


2018년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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