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의 역사 (2)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by Lizy

지금 생각하면 별 거 아니지만,

그때는 거의 상견례를 하러 가는 기분으로

A의 부모님을 뵈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뒤 실제 제 상견례보다도

훨씬 더 긴장되던 날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환경과 밝은 성격 말고는,

내세울 게 없다는 못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더 싹싹하게 굴려고 애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더 채워주고 싶어 지잖아요.

모든 걸 가진 듯한 그에게

제가 줄 수 있는 건 그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A와 함께하는 2년 반동안

저는 넘치게 행복했지만

돌아보니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제가 보기엔 너무나 멋진 사람 곁에 있으려니

상대적으로 제가 작아 보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누가 더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었는데도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자존심을 부려 쿨한 척만 했습니다.

외동아들이라 그런지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 뚱한 표정을 잘 짓던 A.

그럴 때마다 저도 괜히 같이 샐쭉하게 굴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 A의 친구 사이에서

외모로 점수를 매기는 소개팅 앱이 유행이었는데,

어느 날 곰탕 한 그릇 시켜놓고 우리도 해보자며 사진을 업로드했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사진을 골랐지만

온 신경을 곤두세워

점수가 잘 나올법한 사진을 찾았습니다.

앱 구조상 여자가 유리할 테니,

제 점수가 훨씬 높게 나왔고

그제야 안도했던 마음— 그 순간이 생생합니다.

그가 저보다 높게 나왔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어요.

좋아하는 만큼 다 내보이고 기죽기는 싫었던, 그런 마음이었어요.

진정으로 제 모습을 보여줬던 연애는 아니었습니다.


마음가짐이 성숙했던 A는

경제적인 것으로 잘난척하거나 누군가를 평가한 적 없었어요.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제게 많이 나눠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의 서클에 들어가면

나에겐 새롭고 낯선 것들이, 그들에겐 당연해 보였어요.

예전에 연애에서도 잘난 A을 보며

제가 작아지던 순간들이 있었으나,

그땐 제가 더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한창 '수저론'이 대두되던 시기였고,

금수저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그 주변을 만나니

저는 물밑에서 쉬지 않고 발을 구르는 백조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었어요.


저는 진정으로 A를 이해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것을 타고난 A였지만 외로움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때의 저는 그 마음을 이해하려 하기보단,

그냥 배부른 투정이라고 치부했습니다.

미국에서 졸업을 앞둔 그와 롱디를 하던 시절.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어하던 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후회로 남습니다.


A는 제게서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오히려 남들이 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에게 서운함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사이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무엇보다 크다는 걸,

그때의 저는 몰랐습니다.


그때부터였는지

저희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모든 건 제 시선이에요.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건 시시한 이별이었어요.

2년을 덕질했던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과

꽤 허무하게 이별을 했습니다.

잡아보지도 못하고요.

차인 마당에, 쿨하게라도 남고 싶었거든요.

나답지 못한 내 모습에 조금 지치기도 했었어요.


제목이 찌질의 역사인 이유는 이제부터입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친구를 쉽게 잊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인지라

헤어지고 나서 세상이 모노톤으로 느껴졌습니다.

알록달록한 세상을 보여주던 그가 떠나니

내 삶이 단조롭고 무의미하게 느껴졌어요.


맨 정신에는 카톡 하고,

술기운엔 전화하고.

마침 제가 전화한 날이 축구 빅매치가 있던 날이라

그의 친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는 후문을 들었어요.

부끄러웠던 순간이 너무 많아요...

연락했던 그 행동 자체보다는

내 마음조차 정리하지 못해

일관되지 못했던 스스로가 창피합니다.


힘들었던 이별이었습니다.

그를 2년 반동안 만나 남은 게 이 정도의 아픔이라면

시작조차 하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을 그 사람 그늘에서 사는 걸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스물넷의 제가 있었습니다.

(답을 하자면 물론 절대 아닙니다..ㅎㅎ)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주 그가 갑자기 꿈에 나왔어요.

조금 먹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감정이 생경하고 민망한 채로 깨게 되어요.

자기 전 들은 음악 때문 같았어요.

그의 취향은 제 취향의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서도 내가 A를 떠올렸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진 후 술에 취해 집 가는 길엔

늘 그 사람의 소셜 미디어 아이디를 검색해 봤습니다.

비공개 계정이었기 때문에 작은 원안의 프로필 사진, 바이오 정도만 볼 수 있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를 그의 소식이 늘 궁금했어요.


그러다 최근 우연한 자리에서 그의 근황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새로 알게 된 친구가 A의 지인이더라고요.

“A 최근에 결혼했잖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편안해 보이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어요. 그를 만날 때 저는, 동경이 앞섰고 스스로가 부족해 보였어요.

이제 저는 저를 당당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났고,

그는 내면을 더 잘 바라봐줄 사람을 만난 것 같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회의감이 든다며 저를 울렸던..

제게는 비혼주의라던 A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났으니 지금처럼 항상 행복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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