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에서 스물다섯
헤어진 뒤 한 참동안,
그의 프로필 사진과 바이오를 암호처럼 들여다봤어요.
우리가 만난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래 그랬습니다.
저를 가장 작게 만들었을 만큼, 제가 좋아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첫사랑이었던 R과의 이별 후 정말 채 2주도 되지 않아서 A를 만났습니다. 우연히요.
타이밍이 묘했지만, 환승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금요일 저녁. 수업 끝나고 신촌으로 한잔 하러 갔던 날.
대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하는데, 맨날 그렇게 놀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맘쯤의 학교 앞 거리, 봄날의 온도, 습도까지.
눈 감으면 떠오르는 기억이에요.
"오늘 상태 좀 좋은데?" 싶은, 딱 그런 날이었고
금요일 밤 수많은 일일호프 중 어떤 여대에서 한다는 곳을 골랐습니다.
여대 일일호프엔 남자들이 많을 거라는 아주 합리적인 추론 끝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옆 테이블에 앉은 남학생들이 말을 걸었어요.친구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에둘러 거절을 했습니다. 그 때 계단을 내려오는 A을 보았어요. 밝은 베이지색 바지에 오니츠카 타이거를 신고 있던 걸로 기억해요.
정신 차려보니, 저는 이미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어요. 망설임보다 행동이 앞섰습니다.
얼떨결에 제 앞자리에 앉게 된 그.
하필이면 아까 저희가 거절했던 남학생들의 일행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서운해해서 나도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하던 A.
그렇게 보낼 수 없던 저는 뒤따라가서 물었습니다.
“혹시, 그 친구들이랑 많이 친해? 아니면 나랑 계속 놀자.” 아주 필사적이었지만 그날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했을 거예요.
그 결과, 남자 둘 여자 셋이라는 어색한 조합으로 2차에 갔습니다.
당시 저는 통금이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혼이 난다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오늘 늦는다는 문자만 남겨놓고,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너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술이 안 들어갔어요.
말실수라도 할까 봐 사이다만 마시며 새벽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술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말없이 사이다를 계속 시켜주는 A를 보면서, ‘아,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싶었어요.
오로지 A만을 위해 버텼던 술자리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정작 그가 제 연락처를 묻지 않았어요. 다른 남자애는 물어보는데도요.
이제 우리는 강남 가는 차, 강북 가는 차로 갈라져야 하는데.. 급하게 "다 같이 연락처를 교환하자"며 단체방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날, 연락은 제가 먼저 했을 거예요. 늘 그렇듯이.
때깔이 다르던 A는 역시 신촌출신(?)이 아니더라고요.
당시 배우 소속사에서 컨택이 올 정도로 눈에 띄는 친구였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병역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처음 따로 만나던 날, 말 못 한 게 있다길래 혹시 여자친구라도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건 아니고 사실 아직 군인이라 머리가 짧다고— 말년 휴가였고 제대했다는 건 거짓말이라며 긴장해 말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모든 면에서 꾸밈없이 진솔하던 사람이었어요.
이태원에서의 첫 데이트,
그 후 학교로 찾아와 블루문을 마시던 날.
처음으로 드라이브 한 날.
새 차로 한남동까지 갔는데,
주차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거는 걸 깜빡한 바람에
비탈길에서 차가 그대로 흘러가 다른 차를 박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A도 겨우 스물셋이었으니까요.
드라이빙 슈즈를 신고 익숙하게 핸들을 잡던
정말 세련되고 멋져 보이던 그도 사실은 긴장했던 거 같아요. 나 혼자만 이렇게 떨리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오히려 더 좋았어요.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2년 반정도 이어졌습니다.
더 넓은 세상과 감정을 배울 수 있던 완전히 새로운 연애였습니다.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가 많이 바빴었잖아요.
근데 이 친구는 시기상 가장 여유로울 때 저를 만나기도 했지만,
둘 다 노는 걸 좋아해서 시간을 정말 많이 보냈어요.
제주도, 동해, 춘천, 일본.
그리고 그가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동부, 서부, 캐나다까지 갔습니다.
제 첫사랑이 풋풋하게 시작해 말랑해진 연애로 기억된다면 A와의 연애는 가장 잘 익은 어른의 연애에 가까웠어요.
집안이 유복하기도 했지만
그걸로만은 설명 안 되는 타고난 여유로운 매력이 있던 A. 그가 하면 모든 게 다 멋져 보였어요.
그 2년은 말 그대로 덕질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연예인도 좋아하지 않던 제가 인생에서 가장 팬심이 넘쳤던 시기라 하면 바로 그때 일거예요.
그가 좋아하던 음악, 커피, 향수, 스타일—
거의 그의 모든 걸 나노 단위로 사랑했던 거 같아요.
벅찰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던 날들도 있었어요.
카페인에 약한 제가 커피를 많이 마셨을 때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저에게만 공유해 주던 이야기를 들은 날이면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해 행복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안정감으로
그를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렇게라도 그 곁에 있고 싶던 어린 마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