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에서 스물셋
우리가 헤어진 날,
신촌으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학과 교수님과 급하게 면담이 생겨 미안하다는 그에게 "이게 무슨 연애냐"며 펑펑 울었어요.
분하고 곁에 있는데도 외롭고.
말로는, 나랑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거라고 왜 그 맘을 몰라주냐면서.
정작 그 곁에 저는 보이지 않았나봐요. 그렇게 3년 넘게 이어온 첫사랑이 조용히 끝이 났습니다.
아기 엄마가 된 지금.
우리 딸이 언젠가 제 첫사랑을 물으면 R이라고 말할거에요. 어느날 옆에 가만히 눈감고 있는 그를 보니까 갑자기 눈물이 났던 순간이 있어요.
"아, 누군가를 정말 많이 좋아하면 이렇게 가슴아픈 기분이 드는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그게 제게는 첫사랑의 감정이었습니다.
저희는 분명 헤어졌지만, 사실 완전히 끝난 적은 없던 조금은 이상한 사이였습니다.
뜬금없이 안부 연락을 주고 받았고 저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마다 R이 떠올랐어요.
그는 원하는 회사에 들어 갔을 때,
합격 소식을 들은 순간— 그럴때면 꼭 연락을 줬고요.
주변에서는 이상하다고 했지만,
우리 둘 사이엔 설명할 수 없는게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헤어진 후 10년이 넘는 시간 내내 몇번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언제라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만나면서도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는 제게, 그는 "화날 일이 아니야~" 하며 웃었어요. 그 말은 제 화를 더 돋궜죠.
생각해보면, 참 별 것도 아닌걸로 울고 울었어요.
그만큼 모든 걸 함께 나누고, 함께 자라고 싶었던건
그가 제 첫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저는 연인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그 시절엔 나는 너고, 너는 나였어요.
그렇게 같이 뒤엉켜서 자랐습니다.
대선에서 다른 후보를 지지한다고 씩씩대며 우는 절 보며, 그는 그때도 웃었어요.
평소엔 감정 기복이 적고 안정적인 사람이라는 얘길 듣는 저인데도,
그와 함께 있을 땐 감정이 진폭이 유독 컸던거 같아요. 상대적으로 너무 잔잔한 그였고, 역설적으로 치열한 연애였으니까요.
그렇게 항상 여유있고 평온하던 R이 처음으로 제게 단호했던 적이 있습니다.
새내기 시절, 주량을 모른채 술을 마셨고, 아파트 필로티 아래에서 잠이 들었어요..
저를 깨워주신 건 신고를 받고 절 찾아오신 경찰관님이었죠.
그 일로 그는 처음으로 제게 며칠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소중히 하지 않는 모습,
그리고 너를 아끼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 실망스러워."라던 그의 말.
언제나 허허 웃던 사람이었는데,
처음보는 단호한 모습이 서운하면서도 어른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그와의 관계를 통해 제게 온 가장 큰 변화는
제가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한결 너그러워졌다는 것.
새침때기같던 제가 조금은 느슨해진 일.
그렇게 모든 걸 받아주고 그저 웃어넘기던 R.
제가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해주던건
나보다 겨우 한살 많던 나의 첫사랑이었습니다.
그와 헤어진 뒤,
서울 토박이이던 저에게 어느 지역 사람이냐고 묻던 이들이 몇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영향일 거예요.
특유의 그 넉넉하고 다정했던 사투리가,
아직 제 말투 어딘가에 남아있나봅니다.
꼭 금융권에서 일하겠다던 R.
저는 금융이라는게 뭔지도 몰랐지만
경제학 책도 사주고 미래를 이야기 해주던 그 덕에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굴지의 투자은행을 거쳐, 사모펀드 그리고 하버드MBA를 가겠다던 스물한 살의 그는 지금 보스턴에 있어요.
우리가 헤어진지도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제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 사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했던 약속은 빠짐없이 지켜낸 R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도 저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언젠가 그는 제가 자기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라고 했으니까요.
그 말이 저는 슬펐어요. 이미 헤어진 연인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마지막 통화는 제가 제 결혼소식을 전한 날이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목표로 하고 결국 들어갔던 그 회사에 남편 될 사람도 다닌다고 했죠.
그렇게 열심히 날 응원해준덕에 영어도 늘어서 미국인과 결혼한다고 웃으며 이야기했어요.
생각해보면,
배우자를 고르는데에도 그의 영향을 조금 받았습니다.
그가 공돌이였다면 아마 저는 테크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죠. 하하.
그가 진심으로 축하를 전해준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졸업을 할 그가 혹시 포스팅을 올린다면— 저는 꼭 '좋아요'를 누르고 싶습니다.